한 번은 친구가 ‘과기세’가 뭐냐고 물었다. ‘과학과 기술로 읽는 세상’의 준말인데, 세상을 볼 때 과학과 기술을 꼭 포함시켜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친구는 반도체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엔비디아(NVIDIA),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등이 거론되었다.
반도체(半導體)는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외부의 조건에 따라 그 특성이 민감히 변화하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반도체는 1947년에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고 1958년에 집적회로(IC)가 개발되면서 산업화하기 시작했다. 페어차일드와 인텔의 공동 창립자인 고든 무어는 1965년에 반도체의 집적도가 매년 2배씩 증가한다고 예견했으며, 1975년에는 그 기간을 2년으로 수정했다. 반도체의 집적도는 1개의 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숫자에 의해 규정된다.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을 가진 메모리 반도체와 기능이 특별하게 설계된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는 기록된 정보를 읽을 수만 있는 롬(ROM)과 정보를 기록하고 읽는 것은 물론 수정하여 써넣을 수 있는 램(RAM)으로 구분된다. 램의 대표적인 유형인 D램(Dynamic RAM)은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빠르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록해 둔 정보가 없어지는 특성이 있다.
주지하듯,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1980년대에 들어와 D램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1988년에 4M D램을 개발하면서 선두그룹에 편입되기 시작했고, 1994년 256M D램의 개발을 계기로 기술적인 면에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D램 생산량에서 삼성전자는 1992년부터, 우리나라 전체로는 1998년부터 세계 1위가 되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삼성전자가 1993년부터, 우리나라는 2000년부터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반도체업체의 유형이 다변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종합반도체 회사(IDM), 팹리스(fabless) 회사, 파운드리(foundry) 회사 등이 그것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부분 IDM이 설계와 생산을 함께 수행하고 있으며,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에는 팹리스가 설계를, 파운드리가 위탁생산을 담당하는 분업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최고의 강자로 오른 기업은 모리스 창이 설립한 TSMC다. 옛날에는 패키징이 단순조립에 불과해서 뒷방 신세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의 패키징은 고객의 주문을 척척 알아서 반영하는 첨단 분야로 변신했다. TSMC가 파운드리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자, 메모리 분야의 삼성전자나 시스템 반도체의 강자인 인텔도 파운드리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반도체산업에 대한 게임의 법칙이 다시 바뀌고 있다. 2022년에 ‘챗GPT’로 상징되는 생성형 AI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AI 서버에 들어가 데이터 학습과 추론을 돕는 반도체 패키지가 필요해졌다. 그것은 흔히 ‘AI 가속기’로 불리는데,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중심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배치하여 만들어진다.
GPU의 선두 주자는 젠슨 황이 이끄는 엔비디아다. 처음에 엔비디아의 GPU는 게임용 컴퓨터를 위한 그래픽 카드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딥러닝의 아버지’로 작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턴이 2012년 이미지넷 대회에서 엔비디아의 GPU를 활용했고, 이를 계기로 엔비디아는 가파른 성장세에 들어섰다. 엔비디아에서 비싼 AI 가속기를 수만 개씩 구매해야 하는 고객사들의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반해 삼성전자의 납품은 계속 지연되고 있다. 사실상 HBM은 AI 서비스에 특화되긴 했지만, 대용량 D램에서 파생된 것에 해당한다. 그동안 D램의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초(超)격차’를 운운하던 삼성전자가 HBM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분석과 진단이 등장하고 있는데, 필자에게는 삼성의 조직문화에 주목하는 논의가 와닿는다. 이전에는 엔지니어들이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쥐었지만, 최근에는 재무관리 쪽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담대한 도전이 이루어지기 어려워지는 게 당연하다.
기술 중심의 경영, 즉 기술경영의 중요성이 다시 떠오르는 지점이다. 기술경영은 글로벌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기술집약적 중소벤처기업에도 필수적인 덕목이다. 더 나아가 기업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기술경영이 필요하고, 기술집약이 떨어지는 기업도 기술경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든 기업이든 미래의 성장동력을 기술혁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