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스웨덴에 살러 간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집에서 가까운 스톡홀름 함마르비(Hammarby)를 지나다 세컨핸즈숍에 들어섰고, ‘아바(ABBA)’의 나라에 왔으니 이쯤은 하나 사줘야지 하며 먼지 묻은 아바 LP판을 골라 계산대에 섰다. 환전해온 빳빳한 500크로나 지폐를 내밀었는데, 가게 주인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잔돈을 찾으려는 듯 금고를 열었지만 금고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뭐야, 장사가 잘 안 되는 집인가? 아무리 그래도 가게 문을 열어 놨으면 잔돈은 갖고 있어야지.’
‘현금 없는 사회’ 선두주자로 여겨지는 스웨덴에서는 은행 강도도 기자와 비슷한 경험을 했나 보다. 2013년 스톡홀름에서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강도가 은행에 돈을 뺏으러 들어갔다 빈손으로 나왔는데, 그게 뉴스가 됐다. 은행엔 훔칠 현금 자체가 없었다.
기자는 스웨덴에서 ‘현금 없는 사회’를 경험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간 듯했다. 스웨덴은 1661년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했을 정도로 화폐 제도가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지만 지금은 상거래의 90%가량을 비현금 결제수단에 의존하는, 사실상 현금 없는 사회다.
앞서 언급한 세컨핸즈숍도 ‘망한 가게’가 아니라 ‘아주 보통의 가게’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스웨덴에는 현금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카드 결제와 ‘스위시’(Swish)가 대신하고 있었다. 스위시는 사용자 전화번호만 알면 돈을 보낼 수 있는 계좌 연동 모바일 송금 시스템으로, 2012년 스웨덴 은행들이 공동 출시한 서비스다.
은행 계좌를 만들 때 뱅크아이디(BANKID)를 발급 받으며 계좌와 연계한 스위시도 함께 개설해야 했는데, 스위시 이용자가 아니면 사실상 경제 생활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이들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하려 해도 스위시로 돈을 보내야 했고, 유치원 선생님 선물 구입 비용도 엄마들이 스위시로 모아달라고 했다. 길거리 버스킹 공연을 관람한 뒤에도, 교회에서 헌금을 낼 때도 스위시를 한다.
토요일 오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직접 만든 잼과 꿀 등을 파는 장터를 발견했는데, 지갑 없어도 스위시로 구입이 가능했다. 벼룩시장 판매자로 참가할 때는 카드 단말기는 구비할 수 없었지만, 스위시 QR코드를 발급 받아 출력하는 것만으로 손님 맞을 준비가 끝났다. 전통시장이든 개인이든 높은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는 카드용 단말기가 없어도, 현금이 없어도 상거래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정착 초기에 쓰려고 우리돈 수십만 원가량을 현지 통화 크로나로 환전해 갔는데 1년이 지나도록 다 못 쓰고 돌아왔을 정도니 말해 뭐할까.
지난 1일부터 한국은행이 ‘한강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국민 10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험이 반가웠던 이유도 스웨덴에서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CBDC는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의 약자로 각국의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 전자화폐를 말한다. 스웨덴도 현금 없는 사회에는 다가갔지만, 공공재 성격을 띄는 현금 기능이 약화되며 각종 문제를 초래하자 중앙은행 차원의 CBDC, 이크로나(e-krona)를 도입하려 한다.
미국 달러 고정 디지털자산인 스테이블코인을 밀고 있는 미국을 제외하면, CBDC 생태계 구축은 세계적인 추세다. IMF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 134개국이 CBDC 생태계 관련 구상을 추진하고 있고 이 중 66개국은 개발, 파일럿 또는 출시 단계에 있다.
사실상 CBDC는 중앙은행이 현금을 디지털화함으로써 현금의 공공재적 성격을 유지하고, 발권력을 확대해 통화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QR코드 결제’로만 본다면 서운한 측면이 있다. CBDC는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현금 관련 인프라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금융소외계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결제수단이 될 수 있다. 법정화폐로서 가격 안정성이 높고, 민간 페이나 신용카드보다 수수료는 훨씬 적다.
핀테크·빅테크 기업 시장 지배력이 늘고 데이터 집중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블록체인 기반으로 탈세와 자금세탁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CBDC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실험은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테스트 계획이 공개된 2023년 11월, 국제결제은행(BIS) 세실리아 스킹슬리 혁신허브국장은 “BIS는 한국처럼 발전되고 디지털화된 경제에서 CBDC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한 경험을 배울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얼리버드’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국민 10만 명의 사용 후기를 전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