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독립운동가 서영해

입력 : 2025-04-28 17: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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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서영해는 유럽을 무대로 외교관, 언론인, 작가로 맹활약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그는 1902년 1월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한의사 서석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총명했던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막내로 활동했다. 1920년 임정의 외교 활동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홀로 건너가 유학했다. 1929년 파리의 신문학교를 졸업하고, 임정 외무부의 지시를 받아 파리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했다. 임정의 외교특파원으로 유럽 전체를 담당하며 일본의 한반도 침략상과 한국의 참모습을 알렸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이 벌어진 뒤 상하이에 살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경에게 체포됐다. 이때 서영해는 유럽에서 맹렬한 석방 교섭에 나섰는데, 프랑스 정부를 움직여 일본 정부에 압박을 가하고 국제여론을 조성했다. 비록 안창호 선생이 석방되지는 못했지만, 서영해라는 이름과 고려통신사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1926년 김구를 국무령으로 선출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1934년 4월 국무위원회에서 새로 외무행서 규정을 만들어 주미 외무행서에 이승만, 주불 외무행서에 서영해를 임명했다. 이로 인해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서영해는 임정 대유럽 외교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27년 동안 유럽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잊힌 존재가 됐다. 해방 후 이승만이 아닌 김구의 노선을 추종한 데다, 정부 수립 후 상하이로 건너간 뒤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상하이 조선인민 인성학교 1955년 졸업 사진에 교사로 재직했던 사실만 확인된 뒤 종적이 묘연하다.

국가유산청이 지난 17일 ‘독립운동가 서영해 관련 자료’ 323건 686점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했다. 등록 대상 자료는 고려통신사의 독립 선전 활동을 보여주는 문서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주고받은 서신과 통신문, 서영해가 쓴 소설과 수필, 기사와 같은 저술 자료, 유품인 타자기 등이다. 현재 부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오는 5월 16일까지 해당 자료에 대해 의견을 수렴해 검토한 뒤 심의를 거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 서영해의 삶을 제대로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아직 대중에게 낯선 인물일 수 있지만, 독립운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순 없다. 올해가 광복 80주년이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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