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이나 채권 같은 자산을 블록체인 기술로 조각 내어 거래할 수 있다면 어떨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증권형 토큰 발행(STO)’이다. 기존에는 수십억짜리 빌딩이나 기관 전용 채권 같은 자산에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STO는 그런 자산을 토큰으로 잘게 나눠 누구나 투자할 수 있게 만든다. 거래는 블록체인 위에서 이뤄져 더 투명하고 빠르다. 고금리와 부동산 불안정이 겹치는 시대에, 소액으로 안정적인 자산에 분산 투자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개인 투자자도 거대 자산가만 누리던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전 세계는 STO 시장을 빠르게 키워나가고 있다. 28일 글로벌 통계 플랫폼 RWA.xyz에 따르면 전 세계 온체인 실물연계자산(RWA) 시장 규모는 약 216억 달러(약 31조 원)에 달한다. 참여 투자자는 약 9만 8439명, 자산 발행 기업은 189곳이다. 미국 국채, 사모 대출, 원자재 등이 주요 자산으로 거래되고 있다.
한국은 그 흐름에서 한참 뒤처져 있다. 법, 제도를 정비해 기관투자자까지 적극 유입되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추세다. 규제 정비가 투자 유입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 마련의 속도가 시장 선점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일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은 2020년 금융상품거래법 개정으로 토큰증권을 ‘유가증권’으로 인정하고, 전통 금융과 유사한 규제 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부동산, 회사채 등 다양한 분야로 STO를 확장했으며, 누적 발행금액도 1600억 엔(1조 6000억 원)을 넘겼다. 일본은 자본시장 활성화와 국민 자산 형성, 지방경제 부흥을 목표로 규제 친화적 시스템을 정착시켜 실질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시장 선점 시도가 이어진다. 부동산은 물론 음원, 미술품, 심지어 한우를 조각 내어 투자 상품으로 만든 플랫폼도 등장했다. 부산에서는 지난해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BDAN·비단)가 출범, 디지털 실물자산 유통 중심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제도적 기반 부재가 걸림돌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금융당국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 하는 구조 때문에 속도감 있는 사업 추진이 어렵다”거나, “정식 인허가가 없어 대출을 활용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조차 못 한다”고 토로했다. 한 지역 기반 기업은 “특구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중앙 제도권과 괴리가 크다”며 “특정 지역에 국한된 사업자 취급을 받을까 우려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기업들이 잘못한 게 아니다. 법이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국회에는 이미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국회는 입법 기능을 사실상 방기했다. 그 피해는 시장을 준비해온 스타트업들과 투자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돈이고,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행히 최근 여야를 가리지 않고 STO 정책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 흐름이 단지 6월 3일 조기 대선을 앞둔 ‘보여주기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법안 통과라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국회는 서랍 속에 잠든 STO 법안을 꺼내 바로 처리하라는 것이 민생의 열망이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