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는 아직 무더위가 한창인데 이곳에서는 이미 가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35도를 오르내리는 도시 기온과 달리 이곳 숲속 기온은 25도 안팎이다. 더위는 오간 데 없고 시원한 기운이 느껴진다. 식당에서는 에어컨조차 가동하지 않은 채 앞뒤로 열어둔 문을 통해 오가는 이른 가을바람으로 시원한 실내를 유지한다. 이곳은 경남 합천군 해인사다.
■해인사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문을 열고 내리자 바닥이 울퉁불퉁하다. 땅이 고르지 않은 것인지 궁금해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런! 땅바닥이 온통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천지다. 가을이 제철인 도토리를 보면서 신기한 마음은 나만의 것은 아니다. 이른 가을을 느끼러 해인사를 찾아온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도시의 무더위에서 벗어난 해방감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모두의 얼굴은 밝고 시원하다. 일주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가족의 표정은 그지없이 환하기만 하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인지 가벼운 등산복 차림의 중년 부부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푸른 잎이 무성한 숲길을 걷는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기는 하지만 그다지 덥지는 않다. 숲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온 몸을 간질이는 게 기분이 좋다. 숲길 한쪽에 오래된 고사목 한그루가 보인다. 설명문을 읽어보니 해인사 창건 무렵부터 무려 1200년 동안이나 살다 80년 전에 고사했다고 한다.
해인사를 지켜온 고사목에 감사의 인사를 간단히 드리고 고개를 들면 ‘해인총림’이라는 현판이 붙은 봉황문이 나온다. 늦은 가을이면 봉황문 앞 숲길은 잘 익은 단풍이 우거져 잊을 수 없는 ‘사진 맛집’ 역할을 한다. 굳이 단풍철이 아니더라도 이 길은 정말 예뻐서 언제 어떻게 찍어도 훌륭한 사진이 나온다.
오랜만에 뵙는 사대천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봉황문을 지나면 심장 모양의 노란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한 그루가 등장한다. 나무 앞에는 ‘소원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산신이 깃든 곳이어서 가야산에서 가장 영험한 장소이니 이곳에 소원을 적고 간절히 기도하면 모든 게 이뤄진다고 한다.
‘소원나무’답게 많은 소원이 적혔다. 한화 이글스가 올해 프로야구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현상을 반영하듯 ‘한화, 우승하게 해주세요’라는 문구가 보이는가 하면 ‘의대 합격 바랍니다’라는 현실적 글귀도 나타난다. 그래도 가장 많은 글은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이라는 내용이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가족이다.
구광루, 관음전, 대적광전 등 해인사가 자랑하는 여러 건물을 지나 발걸음은 장경판전으로 향한다.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인 장경판전은 지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둘러봤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대표적 건축물인 장경판전은 아직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이번 여행에서 꼭 살펴볼 작정으로 해인사를 찾은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장경판전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크기가 다른 환기용 창으로 덮인 외벽이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한 외국인은 장인, 장모와 함께 건물을 둘러보면서 다양한 창이 신기한지 눈길을 떼지 못한다.
고대 로마인은 물을 운반하는 수로를 만들 때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정말 미세하게 기울기를 조절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단순한 건물인 장경판전에는 현대 건축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한 환기와 습도 조절의 과학이 숨어 있다고 하는데 이런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조상들이 고대 로마인 못지않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 노력을 기울였을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알 만하다.
■대장경테마파크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을 관람한 김에 정확한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사찰 인근에 자리를 잡은 대장경테마파크로 달려간다. 시계가 오전을 지나 오후로 넘어가면서 해가 뜨거워져 기온이 높아지던 참이라 이제 실외보다는 실내에서 열기를 식혀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대장경테마파크는 팔만대장경과 기록문화를 주제로 한 체험학습 공간이다. 각종 자료가 풍부하고 미디어아트도 다양해서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다. 다만 솔직히 평가하면 어린이라면 누구나 즐거워하겠지만 성인 중에서는 흥미를 못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잘 감안해야 한다.
대장경테마파크 입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문화관부터 둘러본다. 우리나라와 세계의 기록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공간이다. 하이라이트는 3층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다. 반응형 IT 기술을 활용한 빛 축제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빛 축제의 주제는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과정을 표현한 ‘이운(移運)의 사계’다. 단순히 행렬을 표현한 게 아니라 운송 과정을 사계절에 빗대어 나타낸 것이다.
이운 행렬의 시작인 ‘봄’에는 색색 꽃이 화려하게 피고 나비가 날아오른다. ‘여름’에서는 반딧불과 은하수가 온 세상을 밝게 비춘다. 벽에 나타나는 행렬 그림을 만지면 선명한 옷이 입혀지고 반딧불이 흩어진다. 이운 행렬이 해인사에 도착한 ‘가을겨울’에는 붉은 단풍잎과 눈발이 날리고 상큼한 바람이 분다. 마지막으로 풍등의 방이 나타난다. 무사 이운의 소망을 풍등 조명으로 연출한 곳이다. 풍등이 떠다니는 환상적인 공간이어서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
기록문화관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활용한 ‘신왕오천축국전’ 전시실도 있다. 우리나라 기록문화 발달사를 담은 곳인데 디지털, 빛, 영상을 활용한 입체적 전시물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대장경테마파크의 중심시설은 대장경천년관이다. 1층 로비에서 전시실로 올라가는 회전형 계단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둥근 계단 공간에는 동판 대장경이 꽂혔는데 그 위로 입체적인 3D 래핑 영상이 쏟아지는 게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대장경천년관에서는 대장경에 대한 모든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대장경로드실은 부처의 깨달음이 경전으로 기록되는 과정과 경전이 우리나라로 전해지는 과정을, 대장경신비실은 대장경 기록 과정을 재현한 공간이다.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경판을 옮겼던 이운 행렬도 펼쳐진다.
대장경보존과학실에서는 목재로 만든 팔만대장경이 10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비밀을 알려준다. 해인사 장경판전의 건축 기술도 알기 쉽게 풀어 놓았다. 미디어아트 작가 이이남 씨의 ‘천년의 합창’은 대장경을 1000개의 디지털 불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대장경천년관 관람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오른쪽 언덕에 공군항공기 F-36F 한 대가 보인다. 순간 당혹스러워진다. 대장경을 소개하는 시설에 어째서 항공기일까. 합천군청 홈페이지에서 사실을 확인해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전쟁 당시 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 전 대장으로 근무한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은 1951년 7월 18일~9월 18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무장공비가 주둔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조상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폭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명령 거부 덕분에 해인사는 물론 팔만대장경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테마파크에 공군기를 가져다놓은 것이다.
김영환 장군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막판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 총사령관 콜티츠 장군의 사연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히틀러로부터 “파리를 초토화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김영환 장군은 물론 콜티츠 장군은 아무리 상명하복 체제의 군대라 하더라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이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양심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두 사람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