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마 아프 클린트가 사망한 후 그의 유산은 오랜 기간 대중의 시야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조용히 보관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작업은 사후 20년간 공개되지 않았으며 스웨덴 미술계는 물론 국제 미술계에서도 그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이 1972년 설립돼 이 방대한 아카이브의 보존과 연구를 전담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 무명의 회화가 다시 조심스럽게 불려 나오기 시작한다. 198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The Spiritual in Art: Abstract Painting 1890-1985’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는 처음으로 국제적 맥락 안에서 조명되었고, 이후 몇몇 큐레이터와 학자들에 의해 점차 재발견의 흐름이 생겨났다.
특히 2000년대 이후 기존 미술사 서사에서 배제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과 탈유럽 중심의 미술사 재구성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힐마 아프 클린트는 단순한 추상의 선구자가 아닌 완전히 다른 계보를 상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2013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그리고 201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통해 결정적 전환점을 맞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 구겐하임 미술관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 수를 기록하였고, ‘신전을 위한 그림’의 주요 연작들이 나선형의 구조 속에서 새로운 시공간적 질서를 체험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공간 구성을 통해 소개되었다.
중요한 점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화가 단순히 선구자라는 타이틀이나 잊힌 여성 화가라는 호명 안에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코 모더니즘의 선형적 시간 안에서 기능하는 작가가 아니며 그의 작업은 추상이라는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유하도록 요구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추상을 순수한 형식 실험으로 다룬 게 아니라 감지되지 않는 세계의 질서·영적 구조·보편적 원형· 생명의 흐름 등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에 집중했다.
오늘날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화는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동시대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으로 다시 읽히고 있다. 이 회화는 여전히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고, 그 구조는 여전히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화를 단순히 추상의 선구자 혹은 잊힌 여성 화가라는 호명 안에서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상호·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