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계절마다 내 마음을 대변해 준 그림

입력 : 2026-05-14 14:22:14 수정 : 2026-05-14 14: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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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미술관/이강선 외 9인


인생 미술관/이강선 외 9인. 도마뱀출판사 인생 미술관/이강선 외 9인. 도마뱀출판사

어린 코끼리 한 마리가 파란 문 뒤에 서 있다. 코끼리가 이 낡은 문을 부수고 나오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다만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데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뒤돌아설까 앞으로 나아갈까. 코끼리 눈에는 망설이는 빛이 역력하다. 파란 문 너머에는 엄청 크고 붉은 꽃이 보인다. 이 꽃을 쫓는 상상으로 어린 코끼리의 눈망울이 반짝인다. 코끼리 자신을 믿기만 하면 된다. 넘어서야 비로소, 정말 마주하고 싶은 세상이 펼쳐진다. 지난해 에세이 <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내고 부산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이강선 작가가 동아대 미술학과 신상용 교수의 그림 ‘사유적 공간-休’를 보고 느낀 생각이다.

이 그림은 자연스럽게 대전 오월드를 탈출한 ‘늑구’를 생각나게 만든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늑구와 아기 코끼리가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너무 궁금해진다.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던 이 작가에게 어느 날 미술관에서 마주한 그림 한 점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내 그림과 글이 만나는 예술 글쓰기의 즐거움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교사, 일반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예술 감성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그림과 글쓰기, 책과 사람 사이에서 배우고 배움을 나누는 삶이 행복하단다.

<인생 미술관>은 우리의 삶을 유년의 기억,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그려보는 ‘20년 후 어느 날’까지 다섯 가지 시기로 나누어 짚어본다. 10명의 저자들이 이 다섯 번의 인생 계절마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 준 그림 한 점씩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부산에서 34년 동안 교사로 살았던 이 작가가 쓴 글의 제목은 ‘달팽이처럼 천천히, 두 번째 서른을 산다’이다. 달팽이는 느리게 살아도 나선형으로 나아간다. 달팽이처럼 이곳저곳에서 다채로운 삶의 무늬를 그리고, 세상의 작은 파동도 소중하게 느끼며 천천히 걷고 싶어 한다.

맨 앞에 소개된 임지영 씨의 글 ‘이제는 내가, 어린 나를 안아 일으킨다’부터 따라가 봤다. 글은 웃지 않던 유년에 대한 헌사로 시작한다. 청소년기에는 <걸리버 여행기>나 <허클베리핀의 모험>에 빠져 남루한 현실을 잊고 살았다. 청년기에는 산악부에 들어가 힘들어 죽겠다고 울면서도 설악산, 지리산, 덕유산, 치악산을 올랐다. 청년기를 대변하는 그림으로 안개 낀 산을 그린 수묵담채화를 골랐다. “삶이라는 봉우리를 한껏 누리고 즐기며 천천히 올라가도 된다는 걸 깨닫는다. 그림에 많은 색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생에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듯”이라고 쓴 대목이 가슴에 와서 꽂혔다.

나이는 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임 씨의 ‘20년 후 어느 날’은 나이 일흔에 떠나는 나 홀로 여행 이야기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자 인생은 감각의 대륙이 되었다.’ 이렇게 말로는 멋지게 표현하지만, 현실은 꽤 다르다. “더 일찍 왔어야 해. 설레는 로맨스라도 꿈꾸려면. 파도가 하얀 거품을 문다. 사랑도 이제 그만하라네.” 잘 웃지 않았던 어린 나를 지금의 내가 다정하고 따뜻하게 웃어주는 대목이 슬프면서 기쁘다. 글과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공통점도 없는 열 명의 작가들이다. 글솜씨도 훌륭하지만, 그림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 오래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이강선 외 9인/도마뱀출판사/318쪽/1만 8000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