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야마다 쇼지 릿쿄대 교수가 1987년 작성한 ‘한센씨병요양소 다마젠쇼엔의 조선인·한국인의 조사에서’ 자필 원고. 표지에 다마젠쇼엔의 재일한센인 단체 ‘호조회’의 초대회장 문봉수 씨의 사진이 실려있다. 국가기록원
“일본과 모국의 편견을 없애고, 이들의 인간적 존재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오는 일에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다면 좋겠다.”
재일한센인(부산일보 2026년 8월 14일 자 1면 등 보도)을 처음으로 연구한 일본 역사학자의 자필 노트 등이 국가기록원 소장자료에서 확인됐다. 고 야마다 쇼지 릿쿄대 교수는 조선인의 한센병 발병률이 일본인보다 10배가량 높다는 점을 들어 이들의 고통을 식민지배 피해의 연장선에서 바라봤다. 그는 민족과 질병, 고향과의 단절이라는 이중·삼중의 차별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재일한센인을 알리고자 했다.
고 야마다 쇼지 릿쿄대 교수의 자필 원고 중 일본 요양소의 한센병 환자의 인구비를 나타낸 표. 재일조선인·한국인이 일본인에 배해 10배 높다. 국가기록원
22일 <부산일보>는 국가기록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야마다 교수의 자필 노트 등 연구 기록을 확보했다. 야마다 교수는 도쿄 국립한센병요양소 다마전생원의 재일한센인 30명을 직접 만나 구술조사를 하고 이를 책 2권으로 남겼다. 2022년 국가기록원에 기증된 약 5만 8000매 분량의 기록물에 포함된 자료로, 구술조사 참여자 명단과 요양소별 재일한센인 통계, 사망자 명부, 한국에 보낸 편지 등이 담겨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과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재일동포 문제 등을 연구해온 그가 재일한센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대 학살 발굴조사 현장에서였다. 그곳을 찾은 다마전생원 내 조선인 단체 ‘호조회’의 김봉옥 회장과 간부 김상권 씨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그는 1983~1986년 4차례에 걸쳐 제자들과 다마전생원을 찾아 합숙하며 구술조사를 수행했다. 대상자 중에는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왔다가 요양소에 강제격리된 뒤, 해방 후에도 요양소 바깥에 나가지 못하면서 일본에 남게 된 이들도 포함됐다.
■ 가족 찾기 팔 걷고 도왔지만
고 야마다 쇼지 릿쿄대 교수는 한글을 쓸 줄 모르는 재일한센인을 대신해 한글로 편지를 써서 가족 찾기를 직접 돕기도 했으나, 한국 내 한센인에 대한 편견으로 재회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기록했다. 사진은 야마다 교수가 재일한센인 H 씨를 대신해 한글로 작성한 편지. 국가기록원
한글을 쓸 줄 모르는 재일한센인을 대신해 한글로 편지를 써서 가족 찾기를 직접 돕기도 한 그는, 한국 사회의 한센병 편견이 이들에게 또 다른 장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야마다 교수는 1985년 서울경찰청 등에 보낸 편지에서 “50년만에 모국을 방문하여 꼭 누나를 만나고 싶다”는 다마전생원 입소자 H 씨의 소망을 전했다. H 씨의 누나에게 연락이 닿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야마다 교수는 또 다른 원고에 “곧 기쁨은 우려로 바뀌었다. 그가 병을 털어 놓으면 누나가 만나줄 것인가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고민 끝에 야마다 교수가 먼저 한국에 건너가 누나 가족을 만났지만, 남매의 재회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야마다 교수는 이를 두고 “결코 특수 사례가 아니다”며 “병을 밝히고 고향을 방문할 수 있었던 한국인 환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소수사례다”고 분석했다. “한국 사람은 라이(한센병)를 잘 압니다.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요” 등 재일한센인 문집 속 문구를 인용하며 “8·15는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올 것으로 보였지만, 전후민주주의도 그들을 민족적 편견이나 병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해방하는 건 극도로 적었다”고 짚었다.
■ 침략·차별의 연장선에서
구술조사에 대학원생으로 참여했던 제자 이시자카 고이치(68) 릿쿄대 강사는 “선생님은 일본이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 억지로 조약을 맺게 한 때부터 2차대전 이후까지 역사가 연결되어 있고, 그 침략과 차별의 연장선에 이분들이 있다고 보셨다”고 회고했다. 이시자카 씨에 따르면 야마다 교수는 시즈오카 스루가요양소의 한 재일한센인이 차별을 견디다 못해 사람을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며 법정에서 진술하기도 했다.
이시자카 씨는 “일본에서 차별과 무시를 당하고, 본국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을 기록하고 증거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며 “그분들의 삶을 일본 사람이 역사로서 알아야 하고, 그 역사를 한국에 알리는 것까지가 임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