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5월 영국 로열코트 극장에서 극작가 존 오즈번의 희극 작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가 상연됐다. 이 작품은 당시 영국 노동 계층의 찌든 일상을 ‘성난 얼굴’로 묘사하며 기성사회의 질서·권위·제도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어른들은 세상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대목은 박탈감에 휩싸여 있던 청년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50년대 영국에서 활동했던 작가군인 ‘앵그리 영맨’(Angry Young Men) 소속이었던 오즈번은 이 작품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기성세대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전후 젊은 세대의 분노와 열망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에서 촉발된 젊은이들의 분노가 지구촌을 뒤흔드는 중이다. 프랑스 시위는 한 달여 전 고등학생들이 교사 부족과 과밀 학급, 낡은 학교 시설에 항의하면서 시작됐다. 초기 학내 문제에 국한됐던 시위는 고물가와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생계비 위기와 맞물리며 범국민적 저항으로 커졌다. 이러한 집단행동은 유럽 전역의 청년 항의 시위로 번지는 양상이다. 이탈리아와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알바니아, 그리스 등지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청년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로 나선 각국 청년들의 요구는 단일하지 않다. 이탈리아에선 학교 시설 노후화와 에너지 가격, 정부의 교육·복지 지출을 둘러싼 불만이 겹쳤다. 스페인 마드리드 도심에선 주거난에 항의하는 천막촌 시위가 벌어졌고, 포르투갈에서는 임금·연금 인상과 임대료 부담 완화를 요구했다. 벨기에 청년들은 교육 여건 악화와 예산 긴축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리스에선 공교육 투자 확대와 학교 시설 개선을 외치는 상황이다. 아일랜드에서는 대학생 수천 명이 등록금 인하와 학생 주거비 부담 완화를 요구했다. 알바니아에선 높은 등록금과 열악한 대학 환경 이슈를 넘어 경제 침체와 정부 부패 의혹에 대한 시위로 확대됐다. 이처럼 나라마다 청년들의 분노를 촉발한 직접적인 도화선은 다르다. 그러나 올해 미국-이란 전쟁 이후 연료·에너지 가격이 치솟는 가운데, 재정 여력이 바닥난 정부가 청년과 서민의 부담을 덜어줄 지출을 늘리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는 비슷하다.
이번 유럽 청년 시위와 70년 전 ‘앵그리 영맨’은 청년 세대가 느끼는 절망감의 표현이란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전개 양상은 사뭇 다르다. 과거 앵그리 영맨의 분노가 주로 계급사회의 모순과 문화적 가치관에 대한 지적인 반발이었다면, 이번 시위는 생존과 직결된 위기에서 비롯됐다. 치솟는 주택 가격과 물가 폭등 속에서 청년들이 자신들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회 시스템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시위를 주도하는 Z세대의 불만이 국경을 넘어 확산된 데는 공통의 위기의식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청년 실업과 생활비 문제로 경제적 불안이 증폭되는 와중에 기성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청년층의 좌절과 분노는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새로운 동원 방식과 결합해 대규모 시위로 확산하는 흐름이다.
반도체 수출 호황으로 우리나라의 2분기 경상수지 흑자는 1166억 달러로 중국(1937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를 달성했다. 사상 처음으로 제조업 대국인 독일(523억 달러)과 일본(506억 달러)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반도체 덕에 미래대응기금까지 쌓는 우리와 재정 적자에 신음하며 국가부채를 줄여야 하는 유럽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청년이 처한 상황을 보면 유럽 청년들의 분노를 남의 일로 치부할 순 없다. 국가데이터처 ‘9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전체 취업자가 1년 전보다 11만 3000명 증가한 가운데 청년층(15~29세)은 오히려 14만 7000명 줄었다. 청년층 고용률도 44%로 1.1%포인트 하락해 29개월째 내리막이다. 나라 경제는 좋아졌다는데 청년 취업은 갈수록 바늘구멍이다. 반도체 중심의 경제성장이 전체 산업의 고용 확대로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생산과 수출이 늘어나더라도 이에 비례해 신규 고용이 증가하지 않는 산업이라는 분석이 많다. 운 좋게 취업에 성공해도 집값, 전월세 가격 동반 상승으로 인한 주거비와 생활물가 부담으로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유럽 청년들의 시위는 지속 가능한 국가 재정의 건전성과 세대별 부담의 공정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고용, 연금, 복지 등 복합적인 사안을 단순히 세대 간 갈등이나 제로섬 문제로 볼 것은 아니다. 청년 고용, 정년 연장, 양극화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중심을 잡고 모든 세대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