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한 이별들에게

입력 : 2026-11-04 18: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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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버디 대기업 프로 재택러

어제까지 함께하던 동료마저
갑자기 '비활성 사용자' 되는…
떠남도 옅은 흔적만 남는 사회

그럼에도 나만의 애도를 한다
끝맺지 못했기에 더 오래가는
그런 관계도 있음을 새기며…

어느 날 사내 메신저에서 한 동료의 이름이 흐려져 있었다. 계정이 비활성화되었다는 표시였다. 어제까지 함께 회의하던 사람인데,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는 우리 조직에서 지워진 존재가 돼 있었다. 연락처도, 작별의 말도 남지 않았다. 모니터에 새겨진 ‘비활성 사용자’라는 건조한 안내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함께 나눈 대화창은 그대로인데 더 이상 답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글로벌 기업의 재택 환경에서는 이런 이별이 더 서늘하다. 애초에 얼굴을 맞댄 적이 드무니, 떠남조차 화면 속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는다. 책상을 정리하는 뒷모습도, 마지막으로 나누는 포옹도 없이,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접속이 끊어질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한 이별들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끝맺음이 직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하던 친구와, 어느 순간 메시지 창이 조용해진 일. 분명한 다툼도 없이, 서로의 삶이 조금씩 어긋나다 결국 남이 되어 버린 관계. 마지막 대화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흔히 이별이라 하면 눈물의 작별 장면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삶을 가장 오래 할퀴는 것은 오히려 끝인지도 모른 채 끝나 버린 이별들이다. 끝을 알았다면 한 번쯤 돌아보았을 텐데,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이별 말이다.

심리학에는 이런 상태를 가리켜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이라 한다. 명확한 마침표 없이 남겨진 상실, 작별의 의식을 치르지 못한 헤어짐이다. 장례를 치르고 눈물을 쏟아 낸 이별은 시간이 흐르면 아물 자리를 찾는다. 슬픔에도 형식이 있어서, 울고 애도하고 보내 주는 절차를 밟는 동안 마음은 조금씩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끝맺음의 언어를 갖지 못한 이별은 마음 어딘가에 계속 열린 창으로 남는다. 닫을 방법을 모르니 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시린 것이다. “그때 왜 그 말을 못 했을까”, “한 번 더 연락해 볼걸” 하는 가정법의 문장들이, 오래도록 밤잠을 뒤척이게 한다.

서른을 갓 넘기고 보니, 이런 종류의 상실이 부쩍 잦아진다. 누군가는 직장을 떠나며 소리 없이 멀어지고, 누군가는 아무 설명도 없이 관계를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이별도 찾아온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었다 여겨도,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준비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늘 그 자리에 계실 것만 같았던 사람일수록 그렇다.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던 존재가 사라진 자리는, 당연했던 만큼 더 크고 깊게 파인다.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이 뒤늦게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이제는 건넬 상대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평소에 잘하자’는 흔한 다짐으로 서둘러 감정을 닫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 말은 어쩐지 이 상황을 너무 빨리 마무리하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가는 인연이 있으면 오는 인연도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떠난 자리를 서둘러 다른 인연으로 덮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다른 누구로도 대체되지 않는 그 사람이었기에, 나는 온전히 그 인연만을 위한 애도를 하고 싶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별을 서둘러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끝맺지 못한 그 감정을 조금 더 오래 품어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애도를 다르게 생각한다. 애도란 상실을 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떠난 이가 남긴 빈자리를 품은 채로 계속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상처가 아무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 빈자리는 끝내 메워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 자리를 안고 걷는 법을 조금씩 익혀 간다. 비활성화된 동료의 이름을 보며 그의 안부를 잠시 빌어 주는 일. 이제는 멀어져버린 친구와 함께 웃던 순간을 문득 떠올리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일. 좋아하던 음식을 먹다가, 익숙한 길을 걷다가, 불쑥 떠오른 얼굴에 잠시 마음이 머무는 일. 그렇게 끝맺지 못한 이별에도 뒤늦게나마 마음 속으로 이름을 불러 주는 일. 그것이 작별 인사를 미처 건네지 못한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뒤늦은 인사다.

흐려진 이름 하나에서 시작된 생각은, 결국 일터 바깥의 더 큰 이별들로 번져 갔다. 삶은 회의실에서 회의가 끝나듯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늘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을 남긴 채, 다음 장면으로 서둘러 넘어갈 뿐이다. 괜찮다. 끝맺지 못했기에 오히려 마음 속에서 영영 끝나지 않는 관계가 있고, 그 끝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오래가는 사랑의 다른 이름일 수 있을 테니까.

언제나 이 칼럼을 가장 먼저 읽어 주셨던, 친할아버지 고 유재원 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