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의 중국어 능력을 평가하는 중국의 HSK, 일본어 능력을 평가하는 일본의 JLPT처럼, 우리나라에도 외국인의 한국어 능력을 평가하는 한국어능력시험이 있다. 바로 ‘토픽’(TOPIK, Test of Proficiency in Korean)이다. 토픽은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이 시행하고 있는 국가 주도 어학 시험으로서 외국인 유학생의 입학과 졸업, 외국인 노동자 및 이민자의 비자 발급과 취업 등에서 중요하게 활용된다. 그 때문에 많은 외국인이 토픽을 보는데 2024년 한 해에만 49만 명 이상이 응시할 만큼 규모가 크고 공신력을 담보한 한국어능력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국어능력시험 토픽이 네이버에 팔린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슨 공공분야 소프트웨어(SW) 사업을 민간에 개방하는 민간투자형 SW 사업이 있는데, 네이버 컨소시엄(네이버·엔에스데블·대교)의 ‘한국어능력시험 디지털 전환 사업’이 수익형 사업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네이버 컨소시엄이 3500억 상당을 투자하고 토픽 문항 출제에서 채점, 시험 시행에 대한 모든 권한과 토픽 운영에 따른 수익을 가져간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돈으로 토픽을 산 것이다.
정부는 AI를 활용한 토픽 디지털 평가 체계를 구축하면 출제와 채점 등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급증하는 시험 응시 수요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민관협력을 통해 한국어 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대효과는 득보다 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어렵게 조성해 온 한국어 교육 생태계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먼저 AI 활용 자동 문항 생성과 자동 채점, IBT(인터넷 시험) 전면 도입을 통한 응시 기회 확대를 살펴보자. 물론 AI로 시험 문제를 만들고 학습자의 작문, 말하기를 채점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시험을 시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AI가 출제한 문항이 타당도를 확보할 수 있을지, AI 채점 결과가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까지 한국어 교육 학계에서 논문과 같은 객관적 방법으로 네이버 컨소시엄에서 도입하고자 하는 AI 활용 토픽 문항 생성과 자동 채점의 타당도, 신뢰도에 대한 검증이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진 바 없어 이러한 우려가 더욱 커진다.
현재 토픽 문항 출제와 채점은 한국어 교육 전문가 집단의 교차 검증을 통해 문항 타당도와 채점 신뢰도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문항 출제와 채점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지만 그만큼 국제적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경제적 논리만을 앞세워 검증되지 않은 디지털 평가 체계를 도입한다면 지금까지 어렵게 쌓아 온 국가시험으로서의 공신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토픽이 민영화되면 응시료 수익 확대를 위해 PBT(종이 시험)를 폐지하고 PBT보다 두 배 비싼 IBT 방식으로만 토픽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학습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한글 자판으로 쓰기 시험 등을 봐야 하고, 이는 토픽 시험에 대한 접근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인터넷 및 컴퓨터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에서는 시험 자체가 실시될 수 없고, 응시료가 비싸져 저소득 국가의 학습자들은 상대적으로 응시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 결국 이는 국가 차원의 한국어능력시험이 가지는 ‘공공성’을 훼손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어 산업 활성화 문제를 살펴보자. 국립국제교육원의 민간투자형 SW 사업 제안요청서를 검토해 보면 민간기업은 토픽 운영 수익 외 부대사업을 통해 수익을 높일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즉, 토픽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하는 기업에서 토픽 관련 학습 사업을 운영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이것이 공정한 것일까.
네이버 컨소시엄은 수천만 학습자의 개인정보 및 시험 관련 정보를 독점하고 자신들이 만든 알고리즘을 통해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한다. 그리고 이 정보를 활용해 토픽 시험 점수를 쉽고 빠르게 올릴 수 있는 학습 시스템을 구축한 후 학습자를 모집해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이는 국가시험이 공익이 아닌 민간기업의 사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또 기존의 한국어 교육 산업체 및 교육 기관은 경쟁력을 잃고 사라져 지금까지 힘겹게 가꿔온 한국어 교육 생태계는 멸종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시험의 공신력, 공공성, 공정성, 공익성을 이유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국가를 대표하는 어학 시험을 민간기업에 맡기지 않는다. 국립국제교육원은 조속히 토픽 민영화 시도를 철회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