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여성가족부는 공공부문 성별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발표했습니다. 2020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정부 고위 공무원 여성 비율은 평균 37.1%인 데 한국은 8.5%에 불과합니다.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이라는 구조적 장벽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비율입니다. 일각에서 ‘역차별’을 호소하지만, 객관적인 통계 자료들은 사회를 지배하는 쪽이 여전히 남성이라고 말합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OECD 회원국 중 2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11년 연속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바비 인형들이 모여 사는 영화 ‘바비’ 속 가상세계 ‘바비랜드’는 정반대입니다. 여성이 최고인 바비랜드에서 바비들은 인종에 관계없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흑인 여성이 대통령이고, 대법관 전원이 여성이고, 노벨상도 여성이 휩씁니다. 바비 인형들은 다양성을 갖춘 자신들의 모습이 현실 세계의 페미니즘과 성평등 문제도 해결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반면 남자인 ‘켄’들은 바비를 위해 존재하는 장식품 같은 존재입니다. 바비들이 배구 경기를 할 때면 경기장 옆에서 발랄하게 점프를 하며 치어리더 역할을 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영화 주인공인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는 이곳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슬픔이나 괴로움 따위는 모르는 바비들은 매일 밤 파자마 파티를 열고 즐거운 인생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바비(이하 마고 바비)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날부터 몸에 이상이 생깁니다. 자고 일어나니 입냄새가 나고 하이힐 모양대로 까치발 상태였던 발이 평평해집니다. 게다가 허벅지엔 셀룰라이트까지. 완벽한 바비 인형에서 점점 불완전한 인간처럼 변해갑니다. 마고 바비는 ‘이상한 바비’(케이트 맥키넌)를 찾아가 원인을 알게 됩니다. 현실 세계에서 마고 바비를 가지고 놀던 주인과 자신이 점점 강하게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마고 바비는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현실 세계로 가서 주인을 만나야 합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마고 바비는 현실의 미국으로 향합니다. 막무가내로 동행한 ‘무늬만’ 남자친구 켄(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기묘한 모험이 시작됩니다.
마고 바비의 기대와 달리 현실의 미국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올해 발표된 ‘유리천장 지수’에서 미국은 OECD 조사대상 29개국 중 19위로 평균 이하에 머물렀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꼬았습니다. 전형적인 바비 인형과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마고 바비에게 남자들은 추파를 던지고, 희롱하고, 추행합니다. 여기서 멋진 일들은 모두 남성의 차지입니다. 바비 제조사인 ‘마텔’의 경영진도 모두 남자였습니다. 마고 바비는 ‘전형적인 바비’의 등장이 성 상품화와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등 여성인권의 후퇴를 불렀다는 지적을 듣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반면 라이언 고슬링 켄(이하 고슬링 켄)은 가부장제에 눈을 뜨고 환희합니다. 요직을 남자들이 꿰찬 세상, 남성적인 것이 멋진 것으로 그려지는 세상은 켄에게 유토피아입니다. 물론 여성도 능력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금융권에 종사하는 한 엘리트는 켄에게 “가부장제가 아닌 척 하는 것”이라고 귀띔합니다. 고슬링 켄은 남자가 대접받는 세상에서 너무 신난 나머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려 하지만, 무능하기 때문에 의사도, 경영인도, 구조대원도 될 수 없습니다. 켄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설치고 다니는 동안 마고 바비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진짜 주인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를 만나고, 원래의 ‘전형적인 바비’로 돌아가기 위해 글로리아 모녀와 함께 바비랜드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마고 바비보다 먼저 도착한 켄 때문에 바비랜드는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켄이 뿌린 가부장제에 가스라이팅을 당한 바비들이 켄들을 모시고 살고 있는 겁니다. 켄들은 헌법을 바꿔 바비랜드를 ‘켄덤’(켄과 킹덤의 합성어)으로 바꾸려 합니다. 이에 바비와 글로리아 모녀는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살던 바비랜드를 되찾기 위해 힘을 합칩니다. 영화는 만화적 연출과 경쾌한 음악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뮤지컬 영화 못지않은 군무와 파스텔톤을 적극 활용한 미장센으로 독특한 영상미도 선사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핵심 주제가 페미니즘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성향에 따라 호오가 갈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