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계몽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그리 자주 쓰였던 단어는 아니다. 쓰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중국 송나라 때 주희의 <산학계몽(易學啓蒙)>이 그 하나로, 여기서 계몽은 ‘특정 학문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는 일종의 해설을 의미했다. ‘어리석은 이를 가르치거나 깨우친다’는 의미로는 계몽보다는 훈몽(訓蒙)이나 격몽(擊蒙)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였다.
동아시아에서 계몽이 널리 쓰이게 된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 학자들이 서구의 칸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영어로 표현하면 ‘Enlightenment’라는 개념을 굳이 ‘계몽’으로 번역하면서 이후 동아시아에서도 계몽이라는 말이 보편화됐다.
출발부터 어긋났으니 칸트의 계몽이 뒤로 온전히 전해졌을 리 없다. 메이지 이후 일본 사회는 계몽이라는 말을 두고 혼선에 빠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칸트의 자기 각성에 기반한 계몽의 개념은 희석되면서 결국 학문의 공간에서만 남게 됐다. 특히 위정자들이 계몽을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이라는 동아시아 전래의 의미와 뒤섞어 그 쓰임을 굴절시켰다. 국가가 국민을 교화한다는 개념어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사상적 발판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