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일본의 피해의식, 원폭과 공습
필자는 지난 20일부터 3박4일 동안 일본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를 다녀왔다. 23일 아침 히로시마의 호텔 로비에서 `오바마 미 대통령 히로시마에’라는 기사가 '주고쿠신문' 1면에 실린 것을 봤다.
히로시마에 본사를 둔, 역사가 백년이 넘는 이 지역신문은 미국 정부 고위관리 말을 인용해 내달 26-27일 이세시마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를 마치고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원폭 피해지인 히로시마를 방문해 핵 폐기를 호소하는 연설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필자는 22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이곳 자료관에는 원폭의 위력과 참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히로시마 방문이 실현된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헌화하게 될 원폭사몰자위령비(原爆死沒者慰靈碑)에는 "평안하게 잠드소서. 잘못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잘못'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 초래된 것인지, 또 누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원폭과 더불어 일본인의 피해자 의식을 조장한 것이 미군에 의한 공습이다. 당시 일본 전역의 150개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공습으로 50만 명 이상이 죽고 1천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특히 1945년 3월 10일의 도쿄대공습으로 하루 동안 10만 명이나 사망했다.
오사카부와 오사카시가 출연해 만든 '피스 오사카'는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1991년에 조성됐다. 그러나 이런 취지와 달리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 B29 100기 이상이 동원된 8차례의 대공습으로 시민 1만5천 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 공습의 피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전쟁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던 사람들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없고 공습의 주체 미군과 피해자 오사카 시민만 있을 뿐이다.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이 만든 국제평화뮤지엄은 조금 달랐다. 전전 리쓰메이칸이 국가주의적인 교육을 하고 전쟁에 협조적이었다는 점을 반성하고 건학 이념인 `평화와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1992년에 만든 세계 최초의 대학 평화박물관이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만이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냉전 종식 후의 지역분쟁에 이르기까지 현대 전쟁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평화를 구축하는 주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히로시마에는 한국인 피폭자들 많아
재일교포 2세 피폭자인 박 모 할머니를 만났다. 1932년생인 할머니는 두 동생을 삼촌댁에 맡기러 가다가 전차에서 피폭되었다. 불덩이가 전차를 덮쳐 머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피부가 떨어져나간 사람과 화상을 입고 강으로 뛰어든 사람 등 거리는 말 그대로 생지옥 같았다고 증언한다.
평화기념공원 내 후미진 곳에 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가 세운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군인, 군속, 징용자 등 10만여 명의 한국인이 살았으며 이 중 2만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었다.
더럽고 힘든 일이라 꺼리던 쓰레기수집, 군 관련 일이나 하천공사 등에 종사하던 한국인들이 시내 중심부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았지만 이들은 지금까지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고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다.
히로시마 사람들은 원폭이란 말 대신 섬광과 폭음을 즉물적으로 표현한 `피카돈(ピカドン)’이란 말을 쓴다고 한다. 그들이 경험한 원폭에 대한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런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원폭 사용에 대한 사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이 가해자라는 역사적 사실의 희석에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도 존재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미일 간의 감정적 앙금 해소에 기여하고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핵 폐기 호소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그러나 먼저 오바마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일본은 자문해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G7 정상회의 주최국 정상으로서 아베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하고, 회의를 마친 한미 두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일본인과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에 나란히 헌화하고 참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조진구(도쿄대학 법학박사, 국제정치 전공,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연구원)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저작권자 ⓒ 부산일보(www.busa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