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화원으로 손꼽히는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경남 통영에 본영을 둔 삼도수군통제영에서 관직을 지낸 것으로 확인됐다. 화원은 작화기관인 도화서에 소속된 궁중화가다. 그간 문헌 연구를 통해 가능성이 제기된 적은 있지만 공식 기록을 통해 실체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일 재단법인 통영 충렬사에 따르면 창건 420주년을 기념하는 ‘통영 충렬사지’ 편찬을 위해 소장중인 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 ‘화사 김홍도(畫師 金弘道)’가 새겨진 <통제영 좌목(統制營 座目)>이 발견됐다.
통제영 좌목은 통제사 퇴임을 기념해 재직 기간 동안 함께 근무한 막하들을 기록한 현판이다. 그동안 세병관(국보 제305호)에서만 43기 발견됐다. 세병관은 임란 직후인 1603년(선조 36)에 이순신 장군 전공을 기리려 창건돼 객사로 사용된 관아다.
충렬사(사적 제236호)는 이순신 장군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보물로 지정된 ‘명조 팔사품’(제440호)과 정조가 발간(정조19년)한 충무공전서 등을 소장 중인데, 통제영 좌목이 확인된 건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좌목은 총 4기로 △제129대 원중회(영조 48년, 1772년) △제141대 유진항(정조 11년, 1787년) △제168대 유화원(순조 33년, 1833년) △제183대 유상정(철종 9년, 1858년) 통제사 막하 159명의 직책과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중 원중회 통제사 휘하 화사로 기록된 2명 중 1명이 김홍도다. 화사는 행정이나 군사 운용에 필요한 지도나 선체도안, 의궤(중요한 행사와 건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남긴 기록물) 등을 제작하는 군관이다. 원중회 통제사 재직기간이 1771년 2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김홍도의 나이 26세 전후인 시기로 추정된다.
김홍도는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돼 정조 신임 속에 당대 최고 화가가 됐다. 29세 때 영조와 왕세자 어진을 그렸고, 정조 명으로 금강산 일대를 기행하고 명승지를 그려 바치기도 했다. 50세 이후에는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실경산수화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세련된 화풍을 이룩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해학적 감성으로 표현한 독창적인 풍속화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군선도병>(국보 제139호), <풍속화첩>(보물 제527호), <무이귀도도>를 비롯해 <씨름>, <춤추는 아이>, <대장간> 등이 모두 김홍도 작품이다.
앞서 이현주 김해공항 문화재감정위원은 2008년 <조선후기 통제영 화원 연구>를 통해 이우항 통제사(숙종 40년, 1714년)부터 박기풍 통제사(순조 23년, 1823)까지 19명 통제사 휘하에 있던 화사군관 22명 중 한 명이 김홍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일부 문헌에 ‘김홍도가 변방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다, 통제영 그림에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 일부 묻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사료가 없었다.
묵힌 유물들 사이에서 좌목을 처음 찾아낸 이충실 통영사연구회 위원은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를 토대로 김홍도의 통제영 시절 작품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제영 막하를 추적해 오고 있는 김상현 국사편찬위원회 통영지역 사료조사위원은 “김홍도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대표적 화원 가문인 양천 허씨의 허감 선생도 통제영에서 일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불과 6개월 남짓 머물며 역작을 남긴 또 다른 천재 이중섭 처럼 , 이들이 통제영에서 어떤 작품을 그렸을지 연구를 확대할 좋은 기회”라고 짚었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