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경 칼럼] 한국이 핵무기와 사랑에 빠지면

입력 : 2025-01-23 18: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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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 핵보유국 발언
한국 패싱에 핵 위험 전면 노출 우려
대권 잠룡들 자체 핵무장 목소리 높여
국가적 역량 총동원해 핵전략 수립
3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 대비해야
안보 무너지면 민생 경제도 사상누각

영국의 유력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해 8월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하며 한 표현이다. ‘한국 드라마는 늘 전 세계 수백만 시청자들을 긴장시킨다. 한국의 다음 스릴러 드라마는 폭발적인 정치적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 바로 한국이 핵무기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시나리오가 한때는 공상과학소설(SF)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이제는 리얼리티 쇼에 더 가깝다며 과거 극단적 소수만 주장하던 핵무장론이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이 됐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사태로 탄핵 심판대에 서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금 한국 핵무장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한층 강화됐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인 20일(현지시간) 집무실에서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핵보유국)로 지칭하며 북미 관계 개선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22일 트럼프 2기 출범 후 열린 첫 쿼드 회의에서도 한반도 비핵화가 빠졌다.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철회하고 북한의 핵 동결이나 군축을 전제로 한 ‘스몰 딜’에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로서는 북핵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한반도 안보 논의에서 패싱당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의 북한 핵보유국 발언은 불붙고 있는 국내 핵무장론에 기름을 부었다. 조기 대선이 이뤄질 경우 자체 핵무장이 외교·안보 분야 최대 이슈가 될 공산이 크다. 여권을 중심으로 대권 잠룡들이 핵무장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트럼프 취임식 참석차 미국을 찾은 홍준표 대구시장은 “남은 건 남북 핵 균형 정책을 현실화시켜 북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금 시점에서 핵잠재력(유사시 언제든 핵무기를 제조할 기반을 갖추는 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 아닐까 싶다”라고 했다. 유승민 전 의원도 독자 핵무장을 주장한다. 이는 최근 자체 핵무장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70%에 육박하고 있는 여론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남핵으로 북핵을 막는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제 질서는 냉정하고 엄혹하다. 섣부른 핵무장 시도는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 한국은 국제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국이다. 당장 핵연료 수입이 봉쇄되면 원자력발전소부터 멈춰야 한다. 트럼프가 북미 대화를 위해 한국의 핵무장을 묵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핵 균형이 한반도 평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도 환상이다. 핵 보유로 전면전 위험이 줄 수는 있지만 국지적 충돌은 오히려 증가한다는 게 국제정치학의 역설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대표적 사례다.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지만, 국지전과 군비 경쟁은 지속 중이다. 위협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대원칙은 군사적 대응과 대화의 병행이다.

트럼프의 북한 핵보유국 발언은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읽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도 최초 제안자가 트럼프였다는 사실이 당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이를 전달했던 제프 펠트만 유엔 사무차장의 증언을 통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당초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청하고 정의용 당시 안보실장이 백악관을 찾아 트럼프에게 전달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트럼프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한반도 안보 질서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다. 3차 북미 정상회담이 빠르게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북핵 문제가 후순위로 밀릴 것이라는 일반적 관측과도 다르다.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지만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면밀하고 엄중하게 대응해야 할 때다. 국가의 장기적 안보 관점에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고 국익을 극대화하는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다가올 대선 국면에서도 여야를 떠나 한반도 안보 문제만큼은 지혜를 모아야 한다. 폭주 기관차와 같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질주를 막지도 못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만 되뇌고 ‘즉·강·끝’만 목청 높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전쟁은 무능의 결과고 평화는 유능의 결과라고들 한다. 달라진 한반도 안보 환경에서 북한 핵 위협에 맞설 실현 가능한 한국형 핵전략을 정부와 정치권, 군 당국이 머리를 맞대고 짜내야 한다. 그래야 국가적 명운을 걸고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북한을 상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장이 아니라 외교 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이다. 민생 경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안보가 담보되지 않으면 그것도 사상누각이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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