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영화감독 이안의 2007년 작품 ‘색, 계’가 올해 1월 한국에서 재개봉했다. 영화는 전시 상하이와 홍콩을 배경으로 인간 심리를 깊이 탐구한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주인공의 노출 연기에만 관객의 관심이 집중되어 작품의 진정한 면목이 가려 버렸다. 영화의 핵심은 ‘색, 계’라는 제목에 잘 나타난다. ‘색(色)’은 사랑을 의미하는데, 개인적 행복을 대표한다. ‘계(戒)’는 주의하고 조심한다는 뜻이라기보다, 행동의 규범이나 사명을 가리킨다. 영화의 플롯은 바로 색과 계의 갈등, 즉 사랑과 이념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심리를 전개한다.
여자 주인공 왕가지는 홍콩의 대학생인데, 지금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배우 탕웨이가 연기한다. 왕가지가 사랑하는 남자는 광유민과 이묵성, 두 사람이다. 광유민은 대학 연극반의 선배이고, 이묵성은 일본이 중국에 세운 괴뢰 정부의 고위 관리이다. 이묵성이 홍콩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광유민이 매국노를 암살하자고 연극반 동료들에게 제안한다. 왕가지는 애국심 때문에서가 아니라 광유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거사에 적극 참여한다. 광유민은 왕가지를 사업가의 부인(막 부인)으로 위장하고 이묵성 부부에게 접근하여 이묵성을 유혹하도록 한다. 이묵성은 왕가지의 청춘과 미모에 빠져들어 가지만, 암살의 결정적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상하이로 떠나버린다.
3년 후 왕가지는 상하이로 이주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그녀를 광유민이 찾아온다. 그는 국민당 정보부의 비밀 요원이 되어 예전 연극반 친구들과 함께 이묵성의 암살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왕가지는 여전히 광유민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희망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임무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이제 개인의 진정한 자아와 그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 사이의 긴장이 영화의 주제로 부상한다. 왕가지의 진짜 정체는 광유민을 사랑하는 미혼의 젊은 대학생이지만, 막 부인으로 위장하여 이묵성을 사랑하는 척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왕가지와 이묵성의 관계가 지속하면서 정체성의 이중성이 왕가지를 심리적 미로로 몰아넣는다. 막 부인으로서 이묵성을 사랑하는 그녀의 연기는 단순한 겉표지가 아니라, 현실과 속임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두 번째 피부가 된다. 그녀가 캐릭터에 오래 머물수록 그녀의 진정한 자아가 그녀의 역할 아래로 잠기게 된다. 이러한 이중성은 ‘역할 흡입’으로 알려진 심리적 현상을 반영한다.
역할 흡입은 개인의 정체성이 그가 수행하는 특정한 역할에 의해 지배되는 심리적 현상을 가리킨다. 개인의 ‘자기’ 개념은 그가 수행하는 역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원래 지녔던 역할의 잠재적 다양성이 감소되어 버린다. 특히 사회나 집단이 개인에게 특정 역할을 요구하고 개인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스스로 행동과 인간관계를 제한하게 된다.
왕가지는 자신이 실천하는 역할이 자신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광유민과 그의 상관에게 경고한다. 그런데도 국민당 정보부는 왕가지가 역할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왕가지는 거기에 동의하지만 자신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절망적 항변으로 표출한다. 이묵성이 보석상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왕가지에게 선물할 때 그녀는 이묵성에게 도망하라고 말하며 암살의 음모를 알려준다. 이 순간 역할 흡입은 최고조에 달하여, 왕가지의 정체성은 정말로 이묵성을 사랑하는 진짜 연인이 되어버린다.
영화 ‘색, 계’의 심리적 긴장은 도덕적 모호성으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도덕적 모호성은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명확한 구별을 결여하는 상황, 결정, 성격 등을 지적한다. 이런 경우는 주로 윤리적 원칙이 서로 충돌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서 친구에 대한 의리와 사회에 대한 공정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왕가지의 상황도 그러하다. 조국을 위해 봉사하려는 왕가지의 초기 결심은 이묵성에 대한 커지는 애정과 얽혀 심오한 감정적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종종 ‘인지 불협화’라는 용어로 묘사되는 이러한 심리 상태는 사랑과 의무라는 모순된 요구와 씨름하도록 그녀에게 강요한다.
영화 ‘색, 계’는 단순한 멜로물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깊이 파고드는 심리적 역작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명과 개인적 행복 추구의 교차에 휘말린 인간의 잊을 수 없는 초상화를 보여준다. 이안 감독은 왕가지, 이묵성, 광유민의 이야기를 인간 정신의 취약성에 대한 인상적 연구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