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은 망했다, 이날부터

입력 : 2025-04-12 09:00:00 수정 : 2025-04-12 1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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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과연 베짱이처럼 게을러 그리 됐나
몰락에는 출발점이 있었다, 어이가 없는…

중앙집권과 지방자치 두 시대 모두에 몰매
기억 희미해졌다고 상처까지 잊혀선 안 돼

한때 부산의 상징이었던 민락동 수변공원 옆 주차타워의 늙은 어부 그래피티 모습. 지금은 그래피티가 사라졌지만 저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노인과 바다' 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자조섞인 푸념을 하기도 했다. 부산일보DB 한때 부산의 상징이었던 민락동 수변공원 옆 주차타워의 늙은 어부 그래피티 모습. 지금은 그래피티가 사라졌지만 저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노인과 바다' 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자조섞인 푸념을 하기도 했다. 부산일보DB

한때 전국 제2도시였다가 지금은 ‘노인과 바다’뿐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도시.

8대 광역시 가운데 평균 소득이 꼴찌인 도시.

지역청년 3명 가운데 1명이 취직할 곳이 없다며 떠나겠다는 도시.

바로 부산이다. 이 팩트대로라면 부산은 망했다. 그것도 철저히. 가장 가까운 시점에 새로 통계를 잡는다면 이미 제2도시 자리도 인천에 넘어가 있을지 모른다.

부산은 왜 이렇게 처절하게 망하고 말았을까.

부산 밖에서 부산을 바라보며 쉽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진단은 늘 이렇다.

“신발산업 위주 경공업 중심지였던 부산은 주력 산업 쇠퇴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대처하다 중공업이나 첨단산업으로의 산업 구조조정에 실패했다.”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의 모든 지역이 개미처럼 피나게 산업 구조조정을 하는 동안 부산은 놀고 먹었던 베짱이처럼 행동했다는 느낌을 주는 이 말은 과연 사실인가.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부산지역 한 신발 제조업체를 방문해 제조라인을 둘러보는 모습. 이 때에도 부산은 법인세 5배 중과 등으로 인해 벌써 20년이 넘도록 기업 이탈이 심화한 상태였다. 부산일보DB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부산지역 한 신발 제조업체를 방문해 제조라인을 둘러보는 모습. 이 때에도 부산은 법인세 5배 중과 등으로 인해 벌써 20년이 넘도록 기업 이탈이 심화한 상태였다. 부산일보DB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날

개인이든 조직이든 더 나아가 지자체든 국가든 한 대상의 족적을 평가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딛고 서 있는 토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불공평의 대명사처럼 자주 언급되는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가 토대에 깔리면 그 족적을 결과 그대로 평가할 수 없다. 제대로 디디고 서있기조차 힘든 토대에서 왜 도약의 족적을 남기지 못 했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비판하는 당사자가 더 비판받아야 할 행동이다.

기자는 현재 상태 폭삭 망한 듯한 부산의 족적이 기울어진 토대 위에 쌓아올린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기울어진 토대가 만들어진 시점이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봐야 한다는 입장이며 그 시점은 특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날은 1972년 1월 1일이다.

그날은 법인 등록세법이 개정되면서 대도시에 법인을 설립하거나 공장, 분점 등을 설립할 경우 타지역 취등록세의 5배를 중과세하기 시작한 날이다. 오타가 아니다. 2배나 3배가 아니라 자그마치 5배다.

그럼 저 법에서 대도시는 어디를 뜻하는가. 당시엔 서울특별시와 부산직할시 두 곳만이 대도시에 해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부산을 서울과 같은 반열에 놓고 규제를 한 것이다. 인구와 경제력의 도시 집중을 막고 국토 균형발전을 꾀한다는 게 이유였다.

1945년에 28만 명에 불과하던 부산 인구가 25년 만에 20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부산이 압축적인 성장을 거듭하자 당시 중앙집권 정부가 생각해 낸 게 바로 부산 억제책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과 달리 중추관리기능이 약한 부산에 내려진 이 극약처방은 곧바로 부산의 발목을 옥죄는 족쇄가 됐다.

족쇄는 10년 뒤 무게를 더해 하나가 더 달린다. 정부가 제2차 국토계획을 추진하면서 부산을 서울과 함께 성장억제 및 관리 도시로 지정한 것이다. 그 전에 1977년엔 공업배치법에 따라 부산 일대를 제한정비지역으로 지정해 공장의 신설 또는 증설을 법적으로 제한하기까지 이른다.


한때 부산의 주력 제조업체로 이름을 날렸던 LG전자의 전신 금성사 부산 온천동 공장 모습. 현재 부산에서는 금성사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LG전자 제공 한때 부산의 주력 제조업체로 이름을 날렸던 LG전자의 전신 금성사 부산 온천동 공장 모습. 현재 부산에서는 금성사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LG전자 제공

기업 탈부산 러시

부산에 채워진 취등록세 중과세 족쇄는 1995년이 돼서야 풀린다. 20년이 넘도록 채워진 족쇄로 인해 부산이 겪은 가장 아픈 상처는 굵직한 기업의 잇단 이탈이다.

부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찍부터 LG와 삼성 등 대표적인 대기업 집단이 자리를 잡고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던 대기업들이 부산지역 공장 설립 등에 애로를 겪자 경남이나 수도권에 공장을 옮기거나 서울로 본사를 옮기는 등의 조치를 잇따라 취한다. 부산진구 연지동에 위치한 LG 사이언스홀 외에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대기업들의 자취는 그렇게 부산에서 오롯이 사라졌다.

그 시기가 취등록세 중과세와 제한정비지역 지정 등과 대부분 겹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기업들이 부산 규제 때문에 다 나갔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는 말이 되겠지만 기업이 부산으로 올 이유나 메리트가 없어졌기 때문에 부산에서 사업을 접는 것이 낫다고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기업이 떠나면서 부산지역 제조업은 구조조정의 힘을 완전히 잃었다. 중공업이나 첨단산업 등 새로운 산업을 받아들일 혁신역량을 키우기도 전에 대기업부터 빠져나가면서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의 이탈은 갈수록 심화했다. 얼마나 이탈이 심했던지 부산상공회의소가 기업 역외이전 통계를 몇 년 동안 아예 발표조차 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부산지역 기업 역외 이전 등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를 해 온 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김대래 교수는 “서울은 제조업을 인근 지역으로 보내고도 국가 수도로서 중추관리기능을 중심으로 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부산은 역외 이전 이후 이 같은 산업을 일으킬 만한 여력이 전혀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부산 상공업계를 중심으로 무너져 가는 부산 제조업을 살리기 위해 1990년대 거센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수십년 동안 부산의 발목을 묶어온 규제를 극복하고 재도약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부산일보DB 부산 상공업계를 중심으로 무너져 가는 부산 제조업을 살리기 위해 1990년대 거센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수십년 동안 부산의 발목을 묶어온 규제를 극복하고 재도약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부산일보DB

썩어도 준치라 했건만

수십년 동안 규제를 당해 온 부산은 그러면 가만히 있었던가.

1995년 당시 통상산업부가 공업배치법을 개정하면서 인천 등 수도권에 첨단업종 대기업 신증설 허용 등의 내용을 포함시키자 부산 상공계는 분노로 들끓었다. 당시 건설교통부조차 부산 등 광역권 개발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수도권 공장 증설을 허용하면 기업의 수도권 집중이 심화할 것이라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이마저도 무시당했다.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강병중 회장은 부산지역 상공인들의 뜻을 모아 공장용지난에도 각종 규제로 신음하는 부산의 처지를 강변하고 부산의 성장관리도시 규제를 풀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게 거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아직까지도 수도권 규제 완화는 수시로 고개를 들고 부산은 상대적 박탈에 시달리는 중이다.

중추관리기능을 극대화한 수도권의 탐욕적 성장에 비례해 부산은 끝없이 추락했다. 제조업의 궤멸적 몰락에 따라 서비스업 중심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를 거듭했으나 그조차 잇단 좌절을 맛봐야 했다. 20년 넘게 끌어온 신공항 논란이 그랬고 아직도 채울 길이 막막한 북항재개발이 그랬다. 엑스포 유치는 꿈만 꾸기에도 벅찼고 각종 특별법은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로 핵심내용이 빠지기 일쑤였던 데다 복합리조트 같은 과감한 시도는 돌팔매질에 시달렸다.

단언컨대 부산은 부산의 게으름 혹은 무능으로 몰락을 거듭해 온 것이 아니다. 중앙집권 시대엔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일방적 규제의 족쇄를 차야 했고 지방자치 시대엔 역시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이 지역의 정당한 요구까지 배제의 대상이 됐다. 부산의 발을 옥죈 규제와 배제의 역사가 너무 오래돼 시민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고 해서 그로 인한 일방적 피해까지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해선 곤란하다. 중앙집권 시대 중앙정부가 막았던 부산의 성장이 지방자치 시대에서조차 막혀버린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 수도권의 끝없는 팽창을 방치한다면 균형발전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떠벌이는 구두선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부산은 오늘도 규제와 배제로 인한 상처를 딛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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