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연공서열 개혁 없이 '공대 한국' 만들 수 없다

입력 : 2025-08-18 17:59:04 수정 : 2025-08-18 18: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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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세대정치연구소 대표·공모 칼럼니스트

2000년대에도 의대·치대·한의대 등 이른바 ‘메디컬 학과’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요즘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입시 학원에서 배포하는 정시 배치표(자연계) 최상위권에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 의대와 더불어 서울대 이공계 학과들이 여럿 이름을 올렸다. 휴대전화·반도체·자동차·선박 등 우리 대기업의 수출이 나날이 증가하던 시절, 전기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기계공학과를 의미하는 ‘전화기’ 학과들은 취업 보증수표처럼 여겨지며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2010년대 들어 지방대 의대들의 서울대 공대 추월이 시작됐다. 의대라면 대학 브랜드도 상관없다는 신호였다. 변화는 2020년대에 완전히 굳어졌다.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 수리공학부나 컴퓨터공학부 등이 자연계 상위 20위권에 이름을 올렸지만, 2022년부터는 의학 계열 학과들이 상위 20위를 모두 장악했다(종로학원 배치표 기준).

기업 보상, 성과 아닌 근속연수 중심

걸출한 인재에 천편일률적 보수 적용

연구개발에 열심히 몰두할 필요 없어

미국·중국 업체, 글로벌 '스카웃 전쟁'

10년간 연평균 3만 명 국내서 해외로

실적 중심 연봉 책정 등 대책 서둘러야

‘의대에 미친 한국’은 최근 청년층에서도 뜨겁게 논의된 이슈다. KBS가 지난달 방영한 ‘다큐 인사이트-인재전쟁’은 우리나라 의대 열풍을 ‘공대에 미친 중국’과 비교하며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요즘 중국이 1980년대 우리나라와 닮았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전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을 꾀하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연계 최고 인기 학과는 의대가 아닌 공대였다. 수재들이 공대로 모여 치열하게 경쟁한 덕분에 우리나라 제조업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이런 흐름을 꺾은 계기가 됐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외환위기가 어떤 위기였나. 1997년 1월 한보를 필두로 삼미, 진로,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기업들은 당장 불필요해 보이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우선 삭감했다. 관련 인력들은 불황의 칼바람을 곧이곧대로 맞아야 했다. “이공계 일자리는 불안하다”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수능 도입 초기만 해도 반반이었던 인문계와 자연계 응시생 비율은 2000년대 초반 7대 3 이상으로 벌어졌다. 그때의 청소년·청년들이 지금 학부모가 됐다. 이들이 자녀에게 어떤 전공을 권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안정적이면 보상이 작고, 보상이 크면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소득을 얻는다. 면허로 보호받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은 2025학년도 신입생을 제외하곤 2006년부터 줄곧 30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고령인구가 크게 늘고 있고, K-뷰티가 각광받으며 외국인 관광객의 피부과·성형외과 수요도 급증하는 중이다. 의사로선 위험은 적은데 잠재 수익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반면 이공계 일자리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일단 산업 변화가 너무 빨라졌다. 정년 보장은 언감생심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었던 화학·정유·디스플레이·배터리 산업이 최근 큰 어려움에 직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공한다고 해도 따르는 보상은 제한적이다. 기업의 보상 체계가 실적이나 성과가 아닌 근속연수를 중심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연공서열제는 걸출한 천재에 대한 보상을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으로 제한한다. 제아무리 특출난 성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받는 보상이 무능한 상사보다 적다면 굳이 아등바등 연구개발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 의대로 향하거나 회사에서 적당히 자리를 지키는 게 개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이 된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지난 6월 공개한 ‘한국의 고급인력 해외 유출 현상의 경제적 영향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3만 명의 이공계 인력이 해외로 유출됐다”며 “컴퓨터공학, 바이오공학, 로봇공학 등 첨단분야에서 인재 유출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인재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는 단기 실적 중심의 연구평가 체계, 수직적 조직문화와 함께 낮은 보상 체계가 꼽혔다. SGI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과 중심 보상을 강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초 중국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딥시크가 공개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뒤, 샤오미가 딥시크 개발에 참여한 개발자 뤄푸리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95년생인 그녀에게 샤오미가 제안한 연봉은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었다. 어디 그런 연봉을 제안하는 기업이 샤오미뿐이며, 그런 제안을 받는 개발자가 뤄푸리뿐이겠나.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의 제목처럼 세계적으로 ‘인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기업들이 전 세계 이공계 인재를 싹쓸이해 가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연공서열 문화에 손발이 묶인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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