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숙등역

입력 : 2025-08-19 17: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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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훈(1971~)

만덕고개 헐레벌떡 숨 고르다 지나쳤다. 있으면서도 없는 곳, 안개가 사람들만 잡아먹곤 한다는 굴다리 주위에는 흘러 고인 시간이 윤슬 되어 역류의 방식으로만 합류했다지. 나 한 번도 그곳이 있었으리라곤 생각 못했네. 만덕 지나 덕천 구포로만 고여 들었을 뿐, 어느 한갓진 뒷골목 밤길을 걷는 내 손을 꼭 잡은 어머니 신발 뒤축의 경사가 서녘으로 기울어 붉게 문드러지던 8월의 오후,

“인자 쫌만 걸으면 우리집잉께, 쩌그 식당에 들러 칼국수나 먹고 가자.”며 철퍼덕 주저앉아 낙동강 놀을 더듬던 눈길이 정물처럼 붙박힌 미궁 속에서 나 한때 머무른다네, 숙등의 지도는 안개만이 앞장서는 날이 잦았고, 때로는 갈퀴처럼 덜미를 쓰다듬는다네

시집 〈새들반점〉 (2022) 중에서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숙등이 있고, 숙등역이 있습니다. 지나쳤지만 늘 있었던 곳. 우리에겐 가보지 못한 곳, 벌써 잊어버린 곳이 얼마나 많은지요.

낯선 곳에서 밀려오는 기억의 역류, 그리운 어머니를 마술처럼 만납니다. 인간의 기억은 동기나 욕구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는데요. 힘들고 지친 걸음 끝에 문득 만나고 싶은 목소리는 간절함이 아닐런지요.

기억과 상상의 연대, 되돌아오는 시간들. 혼자 걷는 밤의 뒷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노을 속에 서 있는 시인이 내 일처럼 쓸쓸해집니다.

흘러 고인 시간들이 모여있는 곳, 한치앞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안개속에서 아슬아슬한 생의 뒷덜미를 쓸어주는 손길을 느낍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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