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변화하는 여름, 흔들리는 기후 질서

입력 : 2025-08-19 17: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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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 환경대기학과 교수

북태평양 고기압 수축·확장 불규칙
폭염과 폭우 교차 극단적 양상 심화
구조적 변화 관점서 온난화 접근을

논문을 쓰며 참고 자료를 찾다가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1988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내가 방학 숙제로 제출했던 여름 일기였다. 유치하고 서툰 글을 읽는 일은 잠시 오글거림을 불러왔지만, 그 안에는 37년 전 여름의 기후가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린 나는 냇가에서 친구들과 수영하며 지냈고, 8월 한 달은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중순이 되자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변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방학의 마지막을 알렸다.

당시 8월 중순은 참을 수 없는 무더위와 거리가 멀었다. 더위가 찾아와도 나는 밖에서 뛰어놀았고, 땀이 나면 냇가로 달려가 식히곤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의 여름은 여러모로 낯설다. 지난주만 해도 8월 말에나 경험할 법한 늦여름, 초가을 같은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며칠 사이 날씨는 급변해 열대야와 폭염이 찾아왔다. 중위도 지역에서는 7월 장마철에 나타나는 정체전선이 자리 잡으며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서울과 경기도 곳곳이 큰 피해를 보았다. 단 며칠 만에 초가을 같은 선선함은 사라지고, 극심한 여름이 자리를 대신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기후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했다. 하루하루 날씨는 불규칙했지만, 계절의 변화만큼은 약속된 듯 정해진 순서를 따랐다. 초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장마를 걱정하며 긴 비에 대비했고, 장마가 끝나면 무더위 속에서 여름휴가를 계획했다. 8월 중순이 되면 저녁 바람이 선선해지며 가을의 시작을 알렸다. 이렇게 불규칙한 날씨와 질서 있는 계절 변화 사이에는, 두 성질을 동시에 지닌 ‘준계절적’ 움직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계절적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팽창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은 여름철 대륙과 해양이 태양열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면서 형성되는 거대한 공기 덩어리다. 온도가 빠르게 오르는 대륙에는 대륙성 저기압이, 천천히 올라가는 바다 위에는 해양성 고기압이 자리 잡는다. 한반도는 이 두 공기 집단의 경계에 놓여, 여름철 날씨가 두 집단의 배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7월 장마 역시 이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북태평양 고기압의 움직임은 계절 변화에 따라 비교적 규칙적인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북태평양 고기압의 경계에서는 다양한 날씨 현상이 발생한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규칙적인 계절 변화에 변화를 부여한다. 이들 기압계는 중위도 제트기류의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발생하고, 북태평양 고기압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달하고 소멸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기와 위치에 영향을 미치며, 반대로 북태평양 고기압의 변화는 중위도 제트기류를 통해 이들의 발달과 이동에도 영향을 준다. 여름철 날씨 예보에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상하면서” 혹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물러나면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북태평양 고기압은 계절 변화의 규칙성과 날씨의 불규칙성을 동시에 가지며, 준주기적 움직임을 보인다.

현재 지구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후 시스템의 체계적 특성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공간 스케일이 커지면서, 원래 불규칙에서 준주기성, 나아가 주기성으로 이어지던 구조적 체계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날씨의 불규칙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더 극단적이다. 비가 내리면 폭우가 되고, 맑은 날씨는 폭염을 동반한다. 준주기성을 띠던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확장도 보다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확장 기간이 길어지면 한반도에 가뭄이 발생하고, 수축하면 거대한 강우 시스템이 형성되어 홍수를 유발한다. 계절적 순환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8월의 날씨는 기존의 7월, 8월, 9월 초의 특성이 혼합된 듯하며, 계절 구분이 흐려져 일주일 사이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현재까지 기후학계와 환경 단체는 기후 온난화를 주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의 관점에서 접근해 왔다. 대중 역시 기후 온난화라고 하면 산업화 이후 지구 전체의 기온 상승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틀리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기후 적응 단계에 들어서면서, 기후 온난화를 단순한 온도 상승이 아닌, 그로 인해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현상을 상변화라고 한다. 주변 온도가 상승하면서 얼음 자체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얼음을 구성하는 물 분자의 배열과 구조적 안정성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섭씨 0도를 넘으면 얼음은 빠르게 구조를 바꾸며 액체 상태로 변모한다. 기후 온난화를 상변화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상변화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를 기후 온난화에 적용하면, 현재 발생하는 기후 재난을 온난화와 연결해 이해하는 논리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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