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에서 근무하는 ‘아라보프’(아나톨리 벨리)와 동료들은 24시간 뒤 소행성이 지구에 추락할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본부는 확률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보고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우려가 현실이 돼 소행성 뒤쪽 사각 지대의 운석 파편들이 우주정거장과 지구를 덮치며 재앙이 시작됩니다. 드미트리 키셀레프 감독이 연출한 ‘플래닛’은 지난해 12월 ‘미라’(MIRA)라는 제목으로 러시아에서 개봉했던 재난영화입니다. 예고편을 보면 컴퓨터그래픽(CG)만 앞세운 전형적인 러시아식 SF블록버스터로 보입니다. 국내 평가가 드물어 해외 영화 사이트인 IMDB에서 리뷰를 보던 중 “할리우드와 한국에서 개봉된 대부분의 작품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흥미진진하다“는 한 해외 누리꾼의 평가에 이끌려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소행성 파편들이 쏟아져 건물과 도로 등 주요 제반시설이 파괴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혼란을 현실감 있게 그렸습니다. 아라보프의 딸 ‘레라’(베로니카 우스티모바)가 아파트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현장감을 극대화시킵니다. 시점은 조금 다르지만 영화 ‘클로버필드’(2008)를 연상시키는 연출입니다. 운석 충돌로 인한 충격파를 시각효과를 통해 사실적으로 구현해 여타 재난영화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장면을 보여줍니다. 열다섯 소녀 레라는 치고받는 자동차들과 무너져 내리는 건물들을 뚫고 사력을 다해 탈출하지만, 대피한 건물이 붕괴돼 잔해에 매몰되고 맙니다. 같은 시각 우주정거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아빠 아라보프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라보프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딸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영화 ‘이글아이’(2008)처럼 CCTV부터 IP카메라, 신호등까지 모든 통신 장치를 제어할 수 있는 장비와 우주정거장 인공지능(AI) ‘미라’를 활용해 딸의 탈출을 돕습니다. 영화는 사실 SF 장르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이라 몰입이 쉽지 않습니다. 우주정거장에 갇힌 우주비행사 아라보프가 지구의 모든 통신장비를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설정부터 억지스럽습니다. 레라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해 신호등은 물론 가게 간판까지 켜는 전지전능한 모습에서 현실감이 사라집니다. 애초에 작은 소행성 파편들이 대기권을 통과하면서도 불에 타지 않고 지표면과 충돌한다는 설정 자체가 비과학적입니다. 현실성을 차치해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주인공 레라의 행동에 개연성이 결여된 탓입니다. 학교에서 유능한 달리기 선수로 활동하는 레라는 감정 표현이 서툴고 내성적입니다. 어린 시절 겪은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와 부모님의 이혼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복 남동생 ‘예고르’(알렉산더 페트로프)에게 소중한 물건도 내어주는 따뜻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 입장에서 레라는 재난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고구마’ 캐릭터입니다.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남동생 예고르를 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유조선 폭발을 막겠다는 이유로 위험한 현장에 직접 뛰어듭니다. 그러나 그 결심이 자연스럽다기보다는 극의 전개를 위한 억지에 가깝게 느껴지는게 문제입니다. 아버지 아라보프도 감정을 이입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아라보프는 레라가 어린 시절 화상을 입게 된 사고 당시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런 아라보프의 심정이 전해지도록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을 적극 활용하는데, 과장된 감정 연기와 사고 장면 묘사가 극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러시아 영화식 슬로우 효과는 진부하고 올드합니다. 영화 종반부에는 가족애를 강조한 신파가 등장해 더욱 몰입을 해칩니다. 감독은 “여기서 울어야 합니다”라고 외치지만,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끌어올리려 노래를 이용한 대목에서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실관람평들을 살펴보니 한 관객도 “마지막은 한국영화인줄”이라는 평가를 남겼네요. 시각효과와 스케일을 앞세운 재난·SF 영화들은 흔히 ‘예고편이 전부’라는 평가를 듣곤 합니다. ‘플래닛’ 역시 예고편에서 기대감을 모았던 극 초반의 운석 충돌 시퀀스를 제외하면, 여타 러시아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참, ‘플래닛’ 예고편에선 영어로 대사를 소화하지만, 실제 극장에서는 러시아어만 들립니다. 전범국가 러시아에 대한 관객의 거부감을 덜어내기 위해 영어로 더빙을 하는 수고를 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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