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의 대모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2017)은 탐정 ‘포와로’ 시리즈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2022년 개봉한 ‘나일강의 죽음’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시리즈는 품격과 강단을 갖춘 탐정 ‘에르큘 포와로’(캐네스 브래너) 캐릭터와 원작 소설 기반의 탄탄한 시나리오, 그리고 빼어난 영상미가 특징입니다. 지난 13일 개봉한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포와로 시리즈 3편입니다. 역시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인 ‘핼러윈 파티’를 원작으로 합니다. 영화는 1947년 이탈리아 수상도시 베니스(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은퇴한 포와로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려 합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매정할 정도로 무시하고 여유 있는 삶을 만끽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이자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작가인 올리버(티나 페이)가 그를 찾아옵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를 수 있다며 최근 유명인이 된 영매 레이놀즈(양쯔충)의 속임수를 함께 알아내자는 겁니다. 호기심이 생긴 포와로는 핼러윈데이에 올리버와 함께 망자를 부르는 의식인 교령회가 열리는 저택을 찾아갑니다. 레이놀즈에게 교령회를 의뢰한 사람은 유명 오페라 가수였던 로웨나 드레이크(켈리 레일리)였습니다. 드레이크의 딸은 1년 전 저택 발코니에서 운하로 떨어져 익사했습니다. 드레이크는 과거 고아원이었던 저택에 아직 원혼들이 살고 있고, 이들이 딸을 죽게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조수와 함께 저택에 도착한 레이놀즈는 드레이크의 딸과 관련한 사적인 정보를 꿰고 있는가 하면, 초자연적인 현상들까지 선보이며 주변을 놀라게 합니다. 명탐정 포와로는 몇몇 속임수를 알아채고 레이놀즈가 가짜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레이놀즈는 빙의된 듯 드레이크 딸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동요하는 교령회 참관자들을 향해 자신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산한 분위기의 저택에서 펼쳐지는 추리극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영상미가 돋보이던 전작들과 달리 호러 요소로 긴장감을 안기는 작품입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포와로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연속으로 펼쳐지고, 사건은 미궁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포와로를 당황케 하는 첫 번째 사건은 주요 인물의 사망입니다. 극 초반부터 살해 정황이 뚜렷해 보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포와로는 ‘범인은 이 안에 있다’며 저택 문을 걸어 잠급니다. 한 공간에 용의자들을 가두고 범인을 찾는 ‘밀실 추리극’ 콘셉트는 여느 탐정 영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관건은 추리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또 결론이 얼마나 설득력 있고 충격적인가 입니다. 이런 면에서 ‘포와로 시리즈’ 전작들은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혹평을 한 관객들의 의견을 모아보면 전개 과정이 지루하고, 긴장감이 떨어지며, 마무리를 급하게 짓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빼어난 영상미와 배우들의 호연이 시리즈 명맥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전작들을 향한 비판을 의식한 듯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호러에 가까운 스릴러 장르로 변신했습니다. 극 초반에 담긴 베니스 풍경에선 시리즈 특유의 영상미가 돋보이지만, 핼러윈 데이가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냉정한 탐정인 포와로는 저택에서 자꾸 헛것을 듣고, 좀처럼 범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작은 단서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마침내 포와로는 매서운 추리로 범인을 지목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깁니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끌고 가는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 덕에 영화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전작들처럼 ‘지루하다’는 비판은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번 작품 역시 아쉬운 점들이 보입니다. 우선 추리 영화 마니아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는 반응입니다. 또한, 뚜렷한 물증이 없는데도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큰 저항 없이 범행을 시인하는 점이 맥빠집니다. 논리적 사고가 중요한 탐정 영화에 귀신이 등장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듭니다. 특히 기자처럼 호러 영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은 귀신이 튀어나오는 장면에서 불쾌감이 들 수 있습니다. 포와로가 결정적 단서를 찾는 과정 등 중요한 대목에 귀신이 개입하는 것도 조금은 황당합니다. 추리 영화라는 장르 본연의 재미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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