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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시정·도정 심판 vs 정권 심판… 막 오른 지선 유권자 선택은
6·3 지방선거 후보 등록이 14일부터 일제히 시작되면서 전국이 본격적인 선거 국면으로 들어갔다. 이번 지선 최대 접전지이자 향후 정치질서 재편에 분수령이 될 부울경의 여야 후보들도 진검승부에 돌입했다. 이번 선거는 지방 권력 재편을 넘어 출범 1년을 맞은 이재명 정부에 대한 첫 전국 단위 민심 평가라는 점에서 정치적 함의가 적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와 함께 출범한 지방권력을 심판해야 한다”고 외치고 국민의힘은 “정부·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고 맞선다. 여야 모두 ‘심판’을 말하지만 정작 선거판은 중앙 정치 대결 양상으로 흐르는 분위기다. 하지만 부울경 유권자가 보고 싶은 것은 누가 더 지역을 책임질 준비가 돼 있느냐일 것이다.
부산시장 선거만 봐도 심판론은 선명하다. 민주당 전재수 후보는 후보 등록 직후 “성과 없고 공허한 박형준 시정을 멈춰야 한다”며 “현 정부와 발맞춰 해양수도 부산 비전을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북항 재개발과 글로벌법, 산업은행 이전 등이 지지부진했다는 점을 내세워 시정 심판론을 전면에 띄운 것이다. 반면 국힘의 박형준 후보는 “이재명 정권의 폭주를 막고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겠다”고 맞섰다. 두 후보 모두 지역 공약보다 정치적 상징성을 앞세웠다는 점은 이번 선거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산이 지선 격전지를 넘어 여야 정치 대결의 바로미터로 떠오른 셈이다.
경남에서는 박완수 국힘 후보와 김경수 민주당 후보가 맞붙고, 울산에서는 김두겸 국힘 후보와 민주·진보 진영 단일화 논의가 맞물리며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 지역 역시 지역 발전보다 진영 결집 메시지가 더 두드러진다. 실제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개별 공약보다 심판론이 더 자주 거론된다. 민주당은 ‘윤석열 키즈’ 프레임을 내세워 “중앙정부와 협력할 지역 일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국힘은 “지방권력까지 내주면 견제 장치가 사라진다”고 맞선다. 전문가들이 이번 선거를 후보 경쟁보다 정당 대결 성격이 강한 선거로 보는 이유다. 문제는 이런 구도 속에서 정작 지역의 미래를 좌우할 정책 경쟁이 뒤로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일까지 20일도 채 남지 않은 만큼 여야의 심판론 공세는 더욱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날 후보 등록 현장에서 더 크게 부각된 것은 청년 일자리와 산업 경쟁력, 교통·주거 같은 생활 현안보다 정치적 대립 구호였다. 부산의 산은 이전과 글로벌법, 경남의 우주항공·방산 산업 전략, 울산의 산업 전환 위기 같은 과제는 중앙 정부와의 친소 관계가 아니라 지역의 실행력과 전략이 성패를 좌우할 문제들이다. 이런 현안들이 정쟁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나선 안 된다. 이번 지선에서 부울경 유권자들의 한 표는 단순한 찬반을 넘어 지역의 다음 4년을 결정하게 된다. 지역 유권자 선택에 부울경의 운명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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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팬스타 북극항로 첫발, 넘어야 할 경제·외교적 파고 높다
부산의 향토기업이자 대표적인 해운선사인 팬스타그룹이 정부의 북극항로 시범운항에 나설 전망이다. 팬스타그룹은 한국해양진흥공사와 한국해운협회가 최근 주관한 ‘북극항로 시범운항 선사 선정 공고’에 단독 신청했다. 팬스타그룹은 최종 확정 통보를 받게 되면 15일 협약을 체결한다. 북극항로 시범운항은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인 ‘북극항로 개척을 통한 신무역로 선점’ 이행을 위해 극지 환경에서 선박 운항 경험과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다. 시범운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30년 상업운항 시대를 연다는 게 정부의 청사진이다.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첫 북극항로 개척에 지역 해운기업이 도전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팬스타그룹은 부산항을 기점으로 여객과 화물을 동시에 운송하는 종합 해운물류 기업이다. 팬스타그룹은 북극항로 시범운항 선사로 참여하기 위해 면밀한 준비를 진행해 왔다. 오는 9월 시범사업에 투입할 선박으로 내빙등급을 보유한 선박 2척을 매입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또 3000TEU급 컨테이너 선박을 북극항로에 띄우는 것이 공모의 목표였던 만큼, 팬스타그룹은 해수부·해진공·해운협회로 구성된 ‘북극항로 활성화 민관협의회’의 지원을 받아 화물 확보에 나선다고 한다. 해수부가 선제적으로 1000TEU가량의 북극항로 화물 수요를 파악한 상황이어서 철강, 자동차 부품 등 부가가치가 높은 화물을 자체적으로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팬스타그룹이 북극항로 개척을 위해 첫발을 내딛게 됐지만, 이제 험난한 길을 마주해야 한다. 경제·외교적 파고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당장은 북극 얼음이 녹는 7~10월에만 열리는 항로를 부정기적으로 운항해야 해서 안정적인 화물 확보가 큰 과제다. 극지 운항 경험이 있는 선원 확보도 부담이다. 북극항로는 부산항에서 출발해 베링해협과 러시아 연안의 북극해를 통과한 뒤 유럽으로 향하는 북동항로와 미국으로 들어가는 북서항로로 나뉜다. 특히, 북동항로는 러시아가 운항 허가와 항로 관리 권한을 쥐고 있다. 미국과 EU의 러시아 제재 기조, 북극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전략적 이해관계도 얽혀 있어 정부 차원의 러시아 협력 체계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
공급망 불안과 에너지 안보 위기가 상시화된 글로벌 정세에서 북극항로는 해상 운송로를 넘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새로운 전략 자산이다. 중동 전쟁으로 인한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로 그 중요성은 더 커지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팬스타그룹의 도전은 부산이 북극항로 개척의 거점으로 도약할 신호탄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북극항로는 동남권과 남부권을 유기적 경제권으로 연결하는 해양 수도권 구축의 핵심 동력이기도 하다. 북극항로 시범운항이 상업운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부와 북극항로 활성화 민관협의회를 중심으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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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철의 사리 분별] 자영업자들이 사라진 골목에서
가끔씩 찾던 식당이 있었다. 회사서 가까워 주로 점심시간에 들리던 곳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찾은 식당엔 폐업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재료 가격 폭등으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손 글씨로 또박또박 쓴 안내문을 읽는 동안 자주 오지 못한 미안함, 친절했던 식당 아주머니가 합리적인 가격을 고수하기 위해 감당했을 그간의 고충에 대한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나눔을 실천하던 이 식당은 ‘착한 가게’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식당이 자리한 골목만 하더라도 이미 문을 닫은 다른 식당과 술집이 서너 곳에 달한다. 이제 이런 풍경은 지역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역세권에도 세입자를 구하는 임대 매물이 넘쳐난다. 자영업자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국가데이터처의 통계는 몰락 중인 부산 자영업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부산 자영업자는 지난 2021년 37만 명에서 2025년 28만 9000명으로 줄었다. 4년 만에 8만 1000명가량 감소한 것이다. 다른 규모의 도시에 비해 대학이 많고 관광 산업도 상대적으로 활성화된 부산은 한때 자영업의 도시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자영업 기반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 부산 자영업자 비율은 그동안 국내 대도시 중 상위권인 20~25%를 유지했지만 지난해 17%로 추락, 전국 평균 19.5%보다 낮아졌다. 더 큰 문제는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상당수도 악전고투 중이라는 것이다. 골목마다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이 넘쳐 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간신히 하루를 버티는 게 상당수 부산 자영업자들의 현주소다.
자영업자들이 폐업하는 가장 큰 원인은 매출 감소로 도저히 영업을 이어갈 여력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영업 부진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거치면서 자영업 근간인 외식업은 배달 플랫폼 위주로 재편됐다. 오프라인 식당은 방문 고객 급감과 배달 수수료 부담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욱이 달라진 외식 문화는 요지부동이다. 불황 장기화로 시민 소비 여력도 급감,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 장기화로 각종 자재 가격까지 폭등해 자영업 경영난을 더 가중시킨다. 최근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성비 맛집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지도 서비스까지 인기를 모으면서 자영업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공공기관과 기업의 구내식당도 자영업자들을 위협한다. 오죽하면 전국 120여 개 소상공인·자영업 단체는 지난달부터 ‘불요불급 관공서 및 대기업 구내식당 폐지를 위한 1000만 범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구내식당 운영을 중단하고 인근 식당 이용을 확대해야 골목상권 회복과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해양수산부가 부산 동구로 이전하면서 지역 경제 활성화 기대감을 높였지만 지난 2월 구내식당 운영 이후 되레 상권이 위축됐다. 상인들은 당초 매출 상승을 기대하며 직원을 추가 채용하거나 해수부 이전 호재로 급등한 임대료를 감내했으나 이젠 매출 부진에 시달릴 뿐이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자영업은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실핏줄이다. 골목상권의 위축은 부산 관광산업 등 지역 경제 체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골목상권이 살아야 부산은 물론 대한민국 경제가 살아난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오랜 시간 골목을 지킨 점포들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 빚만 더 지우는 금융 지원 위주의 정책이나 생색내기식 단기 대책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의 자영업 활성화 정책이 필요하다. 특히 자영업자 등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을 개인 문제라며 외면할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함께 해결할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영업자들이 처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진단하는 작업부터 서둘러야 한다. 공공 배달앱과 지역화폐 사용을 한층 활성화해 자영업 자생력을 높이는 방안도 절실하다. 최근 경남 창원에서 발생한 ‘동네 빵집 옆 대기업 제과점 출점 시도’와 유사한 사례를 막을 제도적 보완도 시급하다.
해외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프랑스는 작은 식당을 지원하기 위해 테라스 문화를 육성한다. 식당 야외 테이블 허가 기준을 완화하고 보행자 중심 거리를 조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일본의 지자체들은 점포 하나가 아닌 해당 거리나 골목 전체를 살린다는 개념으로 자영업 활성화 정책을 펼친다. 오래된 골목 상권을 리모델링하거나 간판·조명·거리 디자인을 개선한 뒤 야시장과 작은 축제 등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는 방식이다. 공실 임대와 가게 승계를 지원하는 정책도 병행한다.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런 정책들의 공통점은 작은 점포 하나하나가 도시의 소중한 문화 공간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도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골목상권이 죽으면 도시 문화와 경제도 함께 붕괴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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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이도류 논란
일본 검술에서 양손에 각각 칼을 들고 싸우는 기술인 이도류(二刀流).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오타니 쇼헤이를 두고 종종 이런 말을 쓴다. ‘투타 겸업’. 말 그대로 투수와 타자를 함께 하는 선수. 프로 세계 그것도 야구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빅리그에서 투타 겸업이라니. 오타니를 생각하면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난해 오타니는 한 시즌 5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개인과 구단 사상 한 시즌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올 시즌 그는 현재 타율 0.233 홈런 7개로 주춤하고 있지만, 아직 시즌 초반이라 반등이 기대된다. 마운드에서는 맹활약 중이다. 오타니는 생애 첫 사이영상을 노려볼 정도로 6경기에 선발 출전해 2승 2패, 37이닝 42탈삼진, 평균자책점 0.97로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보통 선수들은 타자나 투수 한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운데, 투타 모두에서 맹활약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다.
오타니는 MLB 규정도 새롭게 만들게 했다. 투타 겸업 선수 지정 규정이다. 2020년 오타니 때문에 도입된 규정인데, 최근 논란이다.
내용은 이렇다. 빅리그 팀들은 정규리그 개막 후 8월 31일까지 26명의 로스터 중 최대 13명의 투수를 운용할 수 있다. 9월 1일부터 시즌 종료까지는 로스터가 28명으로 늘어 투수 최대 인원도 14명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투타 겸업 선수 지정 규정에 따라 투타 겸업 선수는 투수 보유 한도 규정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오타니를 보유한 다저스는 26명의 로스터 중 투수를 다른 팀보다 1명 많은 14명을 쓰고 있는 셈이다. 시카고 컵스 그레이그 타운셀 감독이 ‘투타 겸업 선수 지정’이 특혜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수치에서 보듯 로스터 26명 중 절반인 13명이 투수인 만큼 투수의 비중이 높은 야구에서 투수 1명을 더 운용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이득이다.
다저스의 데이브 로버츠 감독의 말이 재밌다. 그는 “우리가 오타니 같은 선수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다른 팀들이 오타니 같은 선수를 찾아 나서는 걸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타니는 워낙 특별한 선수이기 때문에 예외적인 존재다. 규정은 규정일 뿐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특별한 선수이기 때문에 예외적인 존재’. 정말 부러운 말이다. 우리도 오타니 같은 선수를 언제쯤 보유할 수 있을까. 김진성 선임기자 pape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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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폭풍의 계절에 읽는 한 권의 세계
이사한 동네에 오래된 미장원이 있다. 들어보니 40년가량 영업을 해오셨다. 한창 젊었을 적 개업한 모양으로 일흔을 넘긴 듯한 주인에게 미장원 상호와 똑같은 이름의 목욕탕이 마주하고 있어서 그 ‘선후관계’가 어찌 되냐 물으니, 목욕탕이 먼저라 한다. 미장원 맞은편에 2층 주택을 리모델링한 듯 1층에는 맥줏집이, 목욕탕은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지만 그 목욕탕은 시내에 있는 큰 규모의 대형 목욕 및 사우나 시설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조그맣다. 앙증맞은 크기의 목욕탕과 미장원을 사이에 둔 골목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재잘거리면서 지나간다. 문구점, 안경점, 미장원, 분식점, 편의점 등의 가게들이 오밀조밀 밀집해 있는 골목을 지나면 더러 3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봄도 한복판이 거의 지나 이제 여름 초입에 들어선 이때, 최근 1~2년 사이에 우리가 경험한 세계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하루도 쉴 새 없이 숨 가쁘게 들썩였던 나날이었다. 잊을 만하면 터지곤 하는 대형 사고를 비롯하여 진영 간 끝없는 모략과 비난으로 잠잠할 날이 없는 정치권, 기득권 세력의 만연한 탈세 및 불법행위와 계층·지역·신분·성별·세대에 따른 배타주의가 여전한 요즘이다. 게다가 선거가 다음 달 초에 예정되어 있어서인지 오전부터 교차로나 인파가 붐비는 공간에서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약과 정책을 호소하는 풍경까지 더해 시내 곳곳은 어수선함과 괜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자갈치시장이나 부평깡통시장 등의 되살아난 활기도 한몫해서인지, 눈뜨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이렇게 왁자지껄한 도심에서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는 일은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삶의 공부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듯 언제 진창 같은 세계의 바닥으로 추락하거나 휩쓸릴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먼 나라에서 진행 중인 여러 전쟁 소식과 이에 영향을 받아 기름값이 치솟는 현실에 정부의 대책과 위정자들의 낙관적인 호소에도 마냥 안심할 수 없는 듯한 시민들의 표정이 봄바람에 떨어지는 시든 꽃잎처럼 그을려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주식 시세가 올라야 한다, 몇 번을 찍어야 한다, 그 집 돼지국밥이 제일 맛있더라, 어느 병원에 가면 싸게 진료받을 수 있다, 그 사람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등등.
한없이 가볍고, 재빠르고, 요령을 부리면서 잇속을 챙기고, 티 나지 않게 생활하면서 은근히 자금을 불리고, 집값과 주식에 몰두하면서 교양을 두르려 하고, 온 데 간 데 모르는 마음이면서 확신과 맹신을 일삼고, 모자란 게 없는데도 욕심을 내면서 타인을 질시하고 스스로를 높인다. 편리해진 기술의 사용에 여가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 우리 자화상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지나가 버린 시간이 옛날이야기처럼 여겨질 때가 잦다. 언제 우리가 그런 시간을 거쳤는지 까마득하게 멀어진 세계를 뒤로한 채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의 불안과 기대에 온 정신을 내맡기기 일쑤다. 이런 모든 게 변화와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익숙해지고 단련된 현대인의 마음 풍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몸에 각인된 면역체계처럼 환경과 시대조류에 관계없이 그 맷집을 유지할 것이다.
일과가 끝나 어스름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한다. 나와 한 버스를 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세계 모퉁이에서 무늬를 그리고 있는지 말이다. 뜬구름 같은 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한없이 가볍고 힘겨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도 아름다움은 곳곳에 스며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대체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면서 평온함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는 것은 바다와 산과 강과 도시와 길과 골목과 사람이 예전부터 뒤척거리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려 했던 ‘항상심(恒常心)’이라는 이름의 선물 때문이지 않을까. 변하는 속에서도 꾸준히 간직하면서 지키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는,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든든하면서도 은은한 등불처럼 늘 꿈과 용기를 안긴다. 오랜 항구를 낀 바다와 발전소를 지나, 마치 시간이 멈춰 선 듯한 우리 동네에 내리면서 올라가는 골목을 들여다보면 책을 읽듯 담벼락이나 길바닥에 흘러 지나갔던 시간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혼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이 시대에도 언제든 돌아가서 뒤적거리면서 배워야 할 진실이 있는 손때묻은 책처럼, 새로운 ‘한 권의 세계’는 사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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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숨겨진 보석, 파니의 녹턴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Fanny Mendelssohn, 1805~1847)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이자 뛰어난 작곡가였다. 그러나 당시의 여성은 사회생활보다 집안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파니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 음악 수업을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는 파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너에게 음악은 그저 장식품 정도일 뿐 삶의 중심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돼... 그러니 앞으로 분별 있게 처신하도록 해라. 그것이 여자다운 것이다.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다.”
아버지는 여성이 음악 작품을 출판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파니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홀로 작곡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중에 하나씩 알려진 사실이지만, 펠릭스의 작품 중에는 누나가 작곡한 것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한 예로 펠릭스가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작품번호 8번인 ‘12개의 노래’를 연주했을 때, 여왕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 세 번째 곡 ‘이탈리안’이라고 했다. 이에 펠렉스는 그 곡을 누나 파니가 작곡한 것이라 밝혔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했다시피, 당시에는 여성이 작곡계에 발을 들여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동생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파니는 프로이센의 궁정화가 빌헬름 헨젤과 결혼해서 몇 번의 유산 끝에 힘겹게 낳은 첫아들의 이름을 제바스티안 루트비히 펠릭스로 지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가 세 명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바흐-베토벤-멘델스존) 이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다시 음악에 몰두했다. 1846년에 첫 작품집 ‘7개의 가곡’을 출판했고, 이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나 1847년 5월 14일 동생이 발표할 ‘발푸르기스의 밤’을 반주하기 위해 연습하던 파니는 갑자기 손을 떨구며 쓰러졌다. 파니는 그날 밤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들은 멘델스존은 너무나 절망하여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마지막 현악 4중주에 ‘파니를 위한 레퀴엠’(Requiem For Fanny)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후부터 시름시름 앓던 멘델스존은 누나의 사망으로부터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똑같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봐도 파니의 음악 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C장조 서곡, 현악 4중주와 피아노 3중주,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3개의 무언가, 피아노 모음곡 ‘일 년’(Das Jahr), 6개의 가곡 등을 남겨놓았다. 그중에서 ‘6개의 멜로디’ 3번 Db장조 녹턴 G단조를 듣는다. 파니가 남겨놓은 가장 아름다운 곡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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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부산시장 블라인드 오디션, 정책 선거 활성화 계기로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아쉬움 가운데 하나는 지역 현안보다 중앙 정치 이슈가 선거판을 삼킨다는 점이다. 도시의 미래를 논해야 할 선거가 어느 순간 정당 대결과 정치 공방, 진영 논리에 매몰되면서 정작 시민 삶과 직결된 정책이나 검증은 되레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부산일보〉가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마련한 ‘부산시장 블라인드 정책 오디션’은 의미 있는 시도라 할 만하다. 후보 이름과 정당을 가린 채 정책 답변만으로 평가한 이번 기획은 유권자에게 정책 중심 선택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부산의 미래를 놓고 어떤 비전과 실행력을 가졌는지 시민이 직접 비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첫 검증 대상이 된 금융·일자리·해양수도·공공기관 이전 등 경제 분야에서 두 후보는 비교적 선명한 차별성을 드러냈다.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후보는 동남권투자공사 설립, 북항 공공SPC 추진, 시장 직속 부산 세일즈단 설치 등 현실적 실행 방안을 구체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는 산업은행 이전과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을 축으로 부산을 세계 해양데이터 허브 도시로 만들겠다는 큰 그림을 제시했다. 특히 ‘공항에서 북항까지 20분 시대’ 같은 시민 체감형 비전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북항 개발과 공공기관 이전 전략에서도 두 후보는 각각 실행력과 비전이라는 서로 다른 강점을 보였다.
정책 평가단은 “두 후보 모두 임기 내 달성 목표와 단계별 추진 일정 등 정량적 로드맵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평가 결과는 25점 만점에 전재수 후보 18.25점, 박형준 후보 17.25점이었다. 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이 두 후보의 도시 비전과 정책 역량을 가늠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다만 아쉬운 건 이런 정책 경쟁이 실제 토론에서는 충분히 이어지지 못한 점이다. 지난 12일 열린 방송 토론에서 두 후보는 정책 대결보다 “까르띠에 시계 받았나” “엘시티 왜 안 팔았나”와 같은 상대 흠집 내기에 가까운 네거티브 공방을 벌였다. 지금 부산은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 등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럴 때일수록 후보에게 요구되는 것은 실질적인 정책과 해법 경쟁이다.
이번 블라인드 정책 오디션은 무기명 검증 방식 속에서도 유권자들이 두 후보의 시정 철학과 정책 방향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지역 유권자들은 이를 통해 부산의 미래를 비교할 기준을 얻게 됐다. 앞으로 두 차례 추가 정책 오디션도 예정된 만큼 남은 검증 과정에서는 부산 현안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일가량 남은 선거 기간, 후보들은 보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고 유권자들은 그 실현 가능성을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번 시도가 정당과 진영 중심 선거를 넘어 비전과 실행력을 겨루는 정책 선거 활성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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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삼성전자 파업 초읽기… 국가 경제 흔들 파국 막아야
삼성전자 노사의 임금협상 2차 사후조정 회의가 13일 새벽 끝내 결렬됐다. 노사는 지난 12일부터 정부세종청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17시간 마라톤 협의를 벌였다. 노조는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고정하고 현재 연봉의 50%로 제한된 성과급 상한 역시 영구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 사 측은 기존 초과이익성과급(OPI) 체계를 유지하면서 호실적 시 특별보상을 추가 지급하는 유연한 방식을 제안했다. 중노위는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며 협의를 지원했지만, 양측 주장의 간극이 크고 노조에서 사후조정 중단을 요청해 이를 받아들였다. 중노위 중재가 무산되면서 오는 21일로 예고된 삼성전자 파업이 초읽기에 들어가게 됐다.
현재 삼성전자 노조의 총파업 예상 인원은 5만여 명에 이른다. 만약 21일부터 18일간 파업이 현실화한다면 반도체 생산 가동 중단 등에 따른 직접적인 피해만 40조 원으로 추산된다. 1700여 개에 이르는 소재·부품·장비 협력사 피해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충격, 국내 주가 하락까지 고려하면 피해가 무려 100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이번 노사 갈등이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 국면과 맞물린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파급력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고객사 이탈과 공급망 훼손 등으로 이어진다면 반도체 산업의 근간을 뒤흔들 리스크가 될 수 있어 더욱 우려스럽다.
총파업 위기가 고조되자 정부의 긴급조정권 발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긴급조정권은 쟁의행위가 국민의 일상을 위태롭게 하거나 국민 경제를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을 때 노동부 장관이 발동하는 예외적 조정 절차다. 긴급조정권이 발동되면 30일간 쟁의행위가 금지되고, 중노위 조정과 중재 절차가 진행된다. 긴급조정권 발동 시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과 정면충돌할 여지가 크고 노동계 반발이 우려되는 만큼 정부는 신중을 기하고 있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과 김민석 국무총리가 13일 노사 간 대화가 우선이란 입장을 밝힌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삼성전자 노사도 마지막 협상의 여지는 남겨 놓은 만큼, 물밑 대화를 통해 이견을 좁혀야 할 것이다.
삼성전자 파업은 한 회사의 노사 갈등을 넘어 국가 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한국 수출의 35%를 차지하고, 경제성장률 기여도도 막대하다. 특히 삼성전자는 국내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의 25%를 웃도는 만큼 파업 시 자본시장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질 수 있다. 엄중한 경제 상황을 고려해 정부는 삼성전자 사태가 파국에 이르지 않도록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야 한다. 삼성전자 노사도 상생의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춰선 안 된다. 모처럼 찾아온 반도체 훈풍으로 절대 호기를 맞은 국가 경제의 근간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모두가 합심해 난국을 넘어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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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우리 아이 괜찮은가요
어린이날 광안리해수욕장 근처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았다. 중2 또는 중3 정도로 보이는 또래끼리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공부는 잠시 내려놓고 친구와 함께 보낸 하루가 어떠했을까. 어린이가 아니지만 어린이날을 즐기는 그들의 얼굴에서 답을 읽을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조카를 만났다. 초등학교 시절 와글와글 떠드는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쫓아낸 담임 선생님 덕분에 신나게 축구를 즐겼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은 적용되지 않는다. 많은 학교에서 점심시간 축구는 금지됐고, 잠깐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은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다.
최근 한 통계는 방과 후 아이들이 희망하는 활동과 실제 활동의 차이를 보여줬다. 친구와 놀고 싶지만 현실은 학원에 가고 과외를 받아야 한다. 성장 과정에 공부도 꼭 필요하지만, 마음이 향하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을 ‘매일 견뎌내고 있다는 것’은 어른이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뉴스를 통해 한국 아이들에 대한 우울한 보고서가 전해졌다. 유니세프 이노첸티 연구소가 발간한 ‘불평등한 기회: 아동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제목의 리포트 카드이다.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아동 웰빙 수준을 측정했는데 대한민국은 신체건강 30위, 마음건강 34위, 역량 3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역량은 학업 성취와 사회적 역량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학업적 성취는 우수하지만 몸과 마음은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마음건강의 경우 4개 국가가 핵심 지표 누락으로 순위 산정에서 제외돼 ‘34위’라는 수치는 바닥에 더 가까운 상황이다.
아동 웰빙 국가 순위표에서 대한민국은 종합순위 27위에 머물렀다. 1~3위를 차지한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가 3대 영역 모두에서 ‘상위 3분의 1’에 포함된 것과 달리 우리는 영역별 격차가 컸다. 특히 각 영역을 측정하는 기준을 보면 마음이 더 답답해진다. 신체건강은 아동 사망률과 과체중 비율, 마음건강은 삶의 만족도와 청소년 자살률을 지표로 삼는다. 삶에 만족하는 15세 아동의 비율은 65%로 하위 6위를 차지했다. 15~19세 청소년 10만 명당 자살률은 10.9명으로, 자살률이 높은 국가 5위에 올라 위기에 처한 마음건강의 현실을 보여줬다.
우리 사회 청소년 자살 문제의 심각성은 여러 데이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2023년 국가손상종합통계를 보면 소아·청소년의 사망원인 중 자해·자살이 53.9%로 가장 많았다. 2024년에는 10~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는 8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77.8%나 증가했다. 유니세프 보고서의 청소년 자살률을 10세까지 확대하면 더 충격적인 수치가 나올 것이다.
13일 발표된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 실태’를 보면 전국 초중고 학생 8764명 중 27%가 최근 1년 동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 생각을 가끔 하는 아이가 23%, 자주 하는 아이가 4%이며 10명 중 1명은 실제 자해를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죽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를 보면 학업 문제가 가장 크고 미래·진로에 대한 불안이 다음을 차지한다. 성적과 성공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아이들을 얼마나 압박하는지를 보여준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무기력증과 번아웃을 호소하는 아이도 많다. 입시의 부담이 큰 만큼 고등학생의 35%가 학업 중단을 생각했다.
이렇게 정신적 위기에 내몰려 있지만 막상 아이들은 고민을 털어놓을 대화 상대가 없다고 말한다. 위기 상황이 와도 도움받을 사람이 없다고 답하는 비율도 9%에 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중고 학생 자살 사망자 수는 2023년 214명, 2024년 221명, 2025년 242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벼랑 끝에 선 듯한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나 위태롭다. 아이들의 마음건강에 들어온 빨간불은 긴박하게 깜빡이는 비상 경고이다.
아동·청소년의 마음건강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2024년 국내 정신질환 진료비 중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료비가 1조를 넘었다. 젊은 층의 중독이나 자살이 증가하는 등 정신건강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3월 제3차 정신건강복지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생애주기별 정신건강 위험 요인에 대한 지원 등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약속했다. 학교 전문상담인력 확보, 긴급지원팀 확충 등 지원책과 함께 내년부터는 성인 중심으로 진행하던 자살 심리부검을 청소년에도 시행할 예정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사회가 건강해야 한다. 아이들의 마음건강 문제는 가정, 학교, 사회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다. 어른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자살 위기 개입을 주제로 연구하는 성진 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 속 한 문장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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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왕사남'과 전세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유배를 온 서울의 관료가 유배지 주민들에게 집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에는 전체 관료의 4분의 1이 경험했을 정도로 유배는 일상에 가까웠다. 이에 갑자기 유배를 간 관료들은 낯선 지역에서 주거 문제 해결이 시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현대의 전세 제도와 비슷한 ‘가사전당’이었다.
다산 정약용도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 기간 지역 유지에게 일정 금액의 재화를 맡기고 주택을 빌려 거주했다. 유배 기간 동안 맡겨 놓은 재화는 다른 이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하는 식으로 굴릴 수 있었기에 집주인에겐 자산 운용 기회가 됐다. 이 가사전당이 원시적 형태의 전세 제도라 할 수 있다. 조선 태조 때 ‘해전고’라는 부서에서 전당을 관장했을 정도로 오랜 전당의 역사가 집에까지 확장된 형태다.
전세가 제도화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라는 설이 있다.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등과 맞물리면서 주택임대차 계약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1899년 4월 황성신문에 전세 관련 기사가 눈에 띄는 걸로 보아 그 시기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세 제도의 전국적 확산은 1970년대 산업화 이후였다.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의 주택 수요가 공급보다 급증했으나 제도권 은행 대출 창구는 찾기 어려웠던 상황이 전세 확산을 부추겼다. 은행에 전세 보증금을 넣어두기만 해도 이자가 한해 10%를 넘을 정도였으니 집주인으로서는 짭짤한 이익이었다. 이후 집을 추가로 살 때 모자란 목돈 보충 통로로도 이용됐다.
그러던 전세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달 부산지역 임차 거래 중 월세 비중이 72%였을 정도다. 전세금 반환용 주택담보대출 한도 축소와 다주택자 대출 규제 등이 이유로 꼽히지만 이자율로 계산해도 월세의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행 예금 금리 2.82%를 기준으로 아파트를 2년 동안 3억 원으로 전세를 주면 기대수익은 월 70만 원 수준이다. 반면 같은 아파트에 월세 전환율 4.23%를 적용하면 월세는 105만 원 정도가 된다. 월세로 전세보다 50% 가량 수익을 더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가 급증하는 현상은 시대가 바뀐 만큼 앞으로 더욱 심화할 듯하다. 이로 인해 향후 집 없는 서민들과 젊은이들만 더 많은 주거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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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 부산은 이제 ‘브랜드 도시’가 되어야 한다
부산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어온 도시였다. 항만이 있었고, 수산업이 있었고, 제조업이 있었다. 사람들은 부산에서 물건을 만들었고, 전국으로 보내고, 세계로 수출했다. 그 시대 부산의 경쟁력은 ‘생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는 단순히 많이 만들고, 싸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글로벌 생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순 제조 중심 경쟁력만으로는 차별화를 만들기 어려워지고 있다. 앞으로 도시와 기업은 단순 제조가 아니라 ‘어떤 경험과 이야기를 만드는가’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최근 많은 사람이 성수동이나 일본 도쿄, 후쿠오카 같은 도시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곳에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그 지역만의 감성과 문화, 이야기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제 제품 자체보다 그 제품이 담고 있는 철학과 경험을 소비한다. 커피 한 잔도 단순히 맛만 보고 선택하지 않는다. 그 공간의 분위기, 브랜드의 태도, 지역의 이야기까지 함께 소비한다. 결국 지금 시대의 경쟁력은 ‘브랜드를 만드는 힘’이다.
부산 역시 이제는 단순 산업도시를 넘어 브랜드 도시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 기업들도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경험을 주는 문화 공간으로 진화해야 한다. 삼진어묵이 ‘어묵베이커리’를 시작했던 이유도 비슷했다. 어묵은 원래 시장이나 반찬의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묵이 가장 맛있는 순간은 “갓 튀겨졌을 때”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빵집처럼 진열하고, 현장에서 바로 만들고, 선물 문화와 연결하고, 공간 자체를 경험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히 어묵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산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를 처음 맡았을 때 단순 생산 중심 구조만으로는 산업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깨달았다. 단순 생산만으로는 모두가 함께 잘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재해석’이었다. 같은 어묵이어도 어떤 가치와 경험을 담아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산업이 될 수 있었다. 브랜드란 단순히 이름이나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제품의 품질, 운영의 지속성, 고객 경험, 만드는 사람의 철학과 애정이 함께 쌓여야 한다. 고객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부산에는 이미 훌륭한 원재료가 많다. 바다가 있고, 항구가 있고, 골목이 있고, 사람이 있다. 문제는 부족함이 아니라 ‘재해석의 능력’이다. 부산은 이제 전통 산업 도시의 이미지를 넘어 새로운 문화와 브랜드를 만드는 도시로 확장되어야 한다. 젊은 창작자와 브랜드, F&B, 디자인, 문화가 연결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오래된 산업도 새롭게 해석되면 전혀 다른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부산은 바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바다를 브랜드화’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원물 중심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수산업을 문화와 라이프스타일 산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일본은 수산물을 지역 문화와 연결해 브랜드화했고, 북유럽은 씨푸드를 건강과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산업으로 발전시켰다. 앞으로는 블루푸드와 해양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수산업도 이제 단순 가공 산업이 아니라 관광, 콘텐츠, 헬스케어, 공간 경험과 연결되어야 한다. 부산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이 가능성이 큰 곳이다. 나는 언젠가 어묵도 세계를 넘어 우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처음 들으면 웃을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결국 산업의 미래는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는 생선을 단순 원물로 보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문화와 경험, 미래 식량 산업으로 바라본다. 그 차이가 도시의 미래를 만든다.
부산 역시 마찬가지다. 부산은 대한민국의 남쪽 끝 도시가 아니라, 앞으로 세계 해양문화와 블루푸드 산업을 이끄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부산이라는 도시를 다시 해석하는 것. 그리고 그 재해석이 결국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 전체를 함께 성장시키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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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의 심성사(心性史), 그리고 앞으로의 50년
심성사(History of Mentalities)라는 개념이 있다. 1930년대 프랑스 아날학파 사학자들이 제시한 역사 연구 방법론으로, 전쟁·정변·조약과 같은 ‘표면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탐구하는 접근이다. 로마사를 심성사적 관점에서 연구한 모토무라 료지 일본 도쿄대 교수는 “심성사가 중요한 이유는 경제나 제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동력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로마 제국의 장기 지속을 ‘심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시민적 명예와 법 질서에 대한 신뢰, 그리고 피정복민을 포용하는 실용적 태도가 사회 전반에 공유되면서 제국의 안정성을 떠받쳤다는 것이다. 결국 심성사란 한 공동체의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분석의 틀을 부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부산 사람들은 어떤 정서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자기상(自己像)을 형성해 왔는가.
먼저 주목할 것은 ‘변경의 심성’이다. 조선시대 왜관이 자리했던 부산은 늘 ‘바깥과 마주 선 도시’였다. 이질적인 문화와 문물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었기에 부산은 자연스럽게 개방성을 내면화한 도시로 형성되었다. 그 결과 항구·무역·물류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외국 문화에 대한 높은 수용성과 새로운 흐름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유연성 또한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감이 누적되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소외의식과 피해의식, 나아가 중앙 의존적 사고가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다음은 ‘환대와 포용의 심성’이다. 약 1000일에 걸친 임시수도 시기 동안 부산은 정부와 유엔,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동시에 품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부산을 가장 역동적인 ‘생존형 도시’로 만들어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형성된 사회는 생존과 기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문화를 낳았고, 이는 창업과 서비스 산업의 활력, 그리고 위기 속에서도 빠르게 회복하는 도시의 탄력성으로 이어졌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이 살다 보니 공동체 결속의 약화와 단기 생존 중심 사고라는 한계도 함께 남겼다.
또 하나는 ‘제2도시의 심성’이다. 산업화 시기 국가 경제를 견인했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서울 중심의 국가 구조 속에서 부산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중앙의 지원과 시혜를 기다리는 도시’로 인식해 왔다. 정치인들이 시내 곳곳에 내거는 ‘중앙 예산 확보’ 현수막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풍경이다. ‘만년 2등’이라는 자기 인식은 어느새 체념처럼 굳어졌다. 이러한 인식은 도전보다는 안정, 주도보다는 추종을 선택하는 경향으로 이어지며 도시의 기개와 상상력을 제약해 왔다.
결국 오늘의 부산은 이 세 가지 심성이 결합해 형성된 도시라 할 수 있다. 개방성과 수용성, 회복력이라는 강점 위에, 중앙 의존적 성향이 함께 얽혀 있는 복합적 도시가 바로 부산이다. 따라서 이 모두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강점은 전략으로, 한계는 의식의 전환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50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심성으로 살아가야 할까. 첫째는 아시아를 ‘리드하겠다’는 글로벌 심성이다. 부산은 더 이상 한반도 동남쪽 끝에 자리한 ‘변경의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태평양과 광활한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전략적 거점이다. 이제 부산은 단순히 세계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관적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흐름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아시아의 의제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 중심에 서겠다는 담대한 기상이 지금의 부산에 요구되고 있다.
둘째는 ‘환대와 포용’의 심성을 자연으로 확장한 ‘친환경의 심성’이다. 산과 바다, 강이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숨 쉬는 곳, 그 자체가 이미 세계적 자산이다. 이제 부산은 친환경이라는 새로운 가치 위에서 부족한 공동체 정신을 다시 세우고, 세계인이 너도나도 살고 싶어 하는 멋진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는 중앙에 기대지 않는 ‘독립의 심성’이다. ‘제2도시’라는 말은 더 이상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한정짓는 언어다. 이제 부산은 그 이름을 내려놓아야 한다. 스스로 길을 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중앙의 결정과 지원만을 기다리는 도시가 아니라, 스스로 의제를 만들고 미래를 주도하는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부산은 ‘의존의 역사’를 과감히 청산하고, 자립과 주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한다.
지금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부산의 다음 50년을 결정짓는 것은 세세한 공약이 아니라, 그 공약을 고르고 밀어붙일 이 도시의 ‘심성’이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심성사를 쓸 각오로 이번 선거를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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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죽음도 상품이 되는 시대 - 데이미언 허스트와 자본주의적 숭고
1990년대 영국 미술계를 흔든 ‘영국 청년 작가들’(YBAs) 중 가장 큰 명성과 논란을 함께 얻은 인물은 단연 데이미언 허스트이다. 그는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상어, 소, 양 등의 사체를 보존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가 회피해 온 죽음의 물리적 실재를 전시장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직접 대면한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서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에서 상어는 여전히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위협은 이미 무력화되어 있다.
칸트적 의미에서 숭고는 인간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거대함이나 압도적 힘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와 두려움을 전제로 했다. 동시에 인간은 그러한 대상 자체보다, 그것을 사유하고 견뎌낼 수 있는 자신의 이성 능력을 자각하면서 숭고를 경험한다. 다시 말해 숭고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공포를 넘어서는 정신의 자각이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숭고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다시 해석하며, 재현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고자 할 때, 다시 말해 이미지와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균열과 부재의 감각에서 숭고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는 18세기 인간 두개골을 본뜬 백금 캐스트 위에 8600여 개의 다이아몬드, 실제 사람의 치아, 이마에 52캐럿의 대형 핑크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작품이다. 여기서 죽음은 혐오나 공포를 넘어 최고급 사치품처럼 제시되며, ‘숭고’는 더 이상 인간을 초월로 이끄는 감정이 아니라, 통제되고 연출된 충격, 혹은 자본의 규모와 욕망을 체감하게 하는 시각적 효과로 전환된다. 허스트의 해골은 죽음을 보여주지만, 정작 죽음 자체는 보여주지 않는다. 이와 같이 허스트의 죽음 이미지는 화려한 표면 아래 결코 완전히 재현되거나 소유될 수 없는 죽음의 공백을 남긴다는 점에서, 리오타르가 말한 포스트모던 숭고의 흔적 또한 드러낸다.
한편, 해골의 과도한 치장은 소비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과 ‘화폐의 물신성(物神性)’을 드러내려는 허스트의 전략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소비 자본주의의 논리에 깊숙이 편입된다는 점에서 역설을 드러낸다. 허스트는 2008년,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판매하던 관행을 깨고, 신작 작품들을 곧바로 소더비 경매에 출품하면서 예술가가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 자체를 작품처럼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능숙하게 희소성, 화제성, 고가 판매 전략을 통해 자본주의 미술 시장을 활용한다. 이 때문에 그는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체제와 공모하는 작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 지점에서 허스트는 예술이 위안이 아니라 불편함을 통해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야 한다는 YBAs의 태도를 가장 극단적으로 구현한 작가라 할 수 있다. 죽음을 장식한 것은 해골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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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리터러시]부모를 위한 디지털 리터러시
“스마트폰 좀 그만 봐”
아마도 부모들이 자녀에게 일상에서 가장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짜증 반, 걱정 반이다. 거실에서, 방에서 조그만 스크린에 몰입해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자식들을 바라봐야 하는 엄마와 아빠 마음은 타들어간다.
질병관리청이 중·고교생들 대상으로 실시한 ‘2025년 청소년건강행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주중 하루에 남학생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은 253.9분, 여학생은 293.2분이다. 주말에 사용시간은 남학생 363.3분, 여학생 424분으로 더욱 증가한다. 주말 동안 우리의 자녀들 대부분이 12~14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스마트폰을 장시간 이용하는 이유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서 이미지와 동영상을 보기 위함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글로벌 현상이다. 호주 정부가 처음으로 칼을 빼들었다. 2025년 12월 10일부터 호주에서는 16세 미만 청소년의 소셜미디어 계정 사용 및 신규 가입을 금지하는 법안이 세계 최초로 시행되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등 주요 10개 플랫폼이 대상이었고, 위반 시에 정부는 4950만 호주달러(약 420~50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 법의 취지는 청소년들을 SNS 과의존 또는 중독을 예방하고 온라인의 유해 콘텐츠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결과 호주에서 약 470만 개의 미성년자 계정이 차단 또는 비활성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의 강력한 법적인 규제 조치 이후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 서구 나라들 역시 유사한 법안을 고려하고 있거나 이미 도입을 한 상황이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조치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의 과의존 및 중독 현상을 청소년 개인의 문제로 방치할 수 만은 없다는 합의가 글로벌 차원에서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3월부터 개정된 초·중·등교육법에 의해 학생의 학습권 보호와 교원의 교육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초중고교 수업 시간 중에 스마트폰 등 개인 스마트 기기 사용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부모님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규제 조치다. 하지만 법적인 규제를 통한 금지만으로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심각한 사회적·교육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실제로, 호주의 경우 긍정적인 변화가 있기도 했지만 많은 청소년들이 규제 대상이 아닌 다른 소셜미디어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이른바 ‘풍선효과’가 발생하기도 했다.
보다 중요하게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이미 세계 최고의 교육열과 경쟁률에 의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는 이들에게 또래 집단들 간의 필수적인 소통 도구이자 정서적인 위안을 얻는 감정적인 피난처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대한 ‘리터러시(literacy)’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해력(文解力)으로 번역되는 리터러시는 원래 ‘읽고 쓰는 능력’을 의미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생태계에서는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소통하는 데 필수적인 스마트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와 윤리적인 활용으로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스마트 미디어가 더 이상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현명하게’ 성장하는 데 오히려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리터러시의 역량 미비는 문해력 저하, 그리고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 청소년의 인지적 능력 하락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동안 디지털 미디어 교육은 학교 현장에서 주로 이뤄졌고, 또한 다양한 교육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과 SNS 포획된 우리 자녀들을 위해 부모가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이해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서 디지털 세계로 이민을 온 우리 부모들이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의 세례를 받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가르쳐야 하는 당혹하고 불편한 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이후 우리 부모들이 알고 이해해야 할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 칼럼을 통해 전해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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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즐거움도 권리다, 유희의 공정성(Play Equity)
필자는 어린 시절 서울의 좁다란 골목에서 해가 질 때까지 마음껏 뛰어놀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학교와 동네 놀이터에서 또래들과 어울리던 시간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하는 존재(놀이하는 인간)라 정의하고 유희는 인간다운 삶을 증명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이라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장애인 정책은 여전히 ‘생존’과 ‘보호’에 치중해 있다. 최근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82.2%가 주된 여가 활동으로 ‘TV 시청 및 휴식’을 꼽았다. 반면 문화예술 관람(4.8%)이나 여행(5.5%) 비율은 처참하다. 특히 중증장애인 10명 중 1.5명은 외출조차 불가능하다. 필자가 서울 골목에서 누렸던 당연한 ‘뛰어놀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거대한 장벽 너머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미 서울 등 수도권은 변화하고 있다. 2016년 ‘꿈틀 놀이터’를 시작으로 시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배포하고 민간 기업들이 동참하고 있다. 동작구를 시작으로 자치구별로 ‘통합놀이터’를 명시한 조례를 제·개정하여 장애·비장애 아동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체계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반면 우리 부산은 어떠한가. 2024년 ‘부산광역시 아동의 놀 권리 증진에 관한 조례’가 마련되었다. 조례의 기본 원칙으로 통합 놀이공간 조성이 언급되어 있고 일부 공원에 무장애 시설이 도입되긴 했으나, 그 수조차 적을 뿐더러 위치가 외지거나 연계 이동 수단이 부족해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기존 놀이터에 휠체어 전용 기구 한두 개를 얹는 식의 산발적인 정비로는 결코 ‘통합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필자는 이를 ‘유희의 공정성(Play Equity)’이라 부르고자 한다.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놀이와 여가를 공정하게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대한민국이 비준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제30조는 장애인의 동등한 여가 활동 참여 권리를 명시한다. 필자는 이를 위해 과거 지역 유휴 부지 활용 논의 과정에서 ‘달팽이 놀이터’를 제안한 바 있다. 휠체어와 유아차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 정상을 향하고 느리지만 안전한 모두의 공간이다. 유럽의 무장애 놀이기구 전문 기업들이 강조하는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Play has no limitations)”라는 선언처럼, 신체적 조건이 즐거움의 장벽이 되지 않는 공간이 부산에도 절실하다. 비록 당시의 논의는 행정의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춰 서 있지만, 그 철학만큼은 부산이 지향해야 할 유니버설 디자인의 이정표다. 이제는 멈춰버린 이 상상력을 깨워 부산만의 특화된 거점형 유니버설 통합놀이터를 구축해야 할 때다. 부산 지역 기업의 사회공헌(CSR)과 연계된 부산형 민관협력 모델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장애인의 날과 가족의 달을 맞아 스스로에게 묻는다. 필자가 골목길에서 누렸던 유년의 즐거움이, 지금 부산의 누군가에게는 장애라는 이유로 차단되어 있지는 않은가. 즐거움은 특권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이며, 그 권리는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한때 함께 꿈꿨던 ‘달팽이 놀이터’의 가치가 부산의 지형적 특성을 살린 통합 공간으로 부활하여, 모든 시민 가족의 즐거움으로 자리매김하길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