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설] 수도권-비수도권 부동산 양극화 해소할 대책 급하다
여당이 지방에 추가 주택 구입 시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 폐지 방안을 제안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지난 18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다주택자가 민간 임대 사업자 역할을 하고, 부동산 자금이 지방으로 유입돼야 한다”며 정책 취지를 설명했다. 서울에 집 한 채를 가진 사람이 비수도권에 집을 추가로 사면 2주택이나 3주택이 돼도 양도세, 취득세 등 중과세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두 번째부터 보유하는 주택이 수도권일 때는 기존 과세 방식을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똘똘한 한 채’로 몰리는 수요를 지방으로 돌리고 수도권과 지방의 부동산 양극화를 완화한다는 것이 목적이다. 정치권에서 먼저 제안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부동산 양극화는 심각하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나홀로 고공행진하고 있지만, 지방 부동산 경기는 침체일로다. 지난 1월 기준 서울 지역 아파트의 평균 가격은 13억 8289만 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반면 부산은 3월 둘째 주 기준 전주 대비 0.08% 하락하며 2022년 6월 이후 143주째 줄곧 하락세다. 최근 서울시가 강남권을 중심으로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해제를 번복하면서 지방 부동산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수도권 중심의 부동산 정책이 지역 부동산 경기를 고사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산은 최근 2년 사이 건설업 취업자가 급감하고 공인중개소도 매일 3곳이 문을 닫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수도권 공급 위주의 부동산 대책으로 양극화를 심화시켜 왔다. 지난해 8월에도 ‘8·8 부동산대책’을 발표했다. 서울 집값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까지 풀어서 아파트를 대거 짓는 등 향후 6년간 42만 7000호의 주택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정부 재원과 국가 자원을 가뜩이나 활황인 수도권 부동산 부양에 동원해 수도권 초집중과 지방 소멸을 가속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달 내놓은 지방 건설경기 활성화 대책은 ‘반쪽짜리’란 평가를 받았다. 악성 미분양 매입 등 건설사 지원에 방점이 찍혔고, 취득·양도세 등 세제 지원과 대출 규제 완화 등 수요 증대 방안이 빠졌기 때문이다.
여당이 제안한 지방 주택 양도세 중과 면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부동산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인구 감소로 침체의 늪에 빠진 지방 주택시장을 살릴 수 있는 투자 수요에 물꼬를 틀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책 시행을 위해 당정 협의, 여야 협의, 사회적 공론화 등 단계는 거쳐야 한다. 정치권은 이를 정쟁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정부도 수도권의 기형적 확장을 초래하고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부동산 정책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부동산 양극화를 해소할 차별화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지방 부동산 경기를 살릴 수 있는 과감한 규제 완화 등 확실한 로드맵 제시가 시급하다.
-
[사설] 부산교육감 선거운동 돌입… 이념 대결장 전락 우려
4·2 부산교육감 재선거가 오늘부터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교육정책 논의는 뒷전으로 밀리고 이념 대결로 흐르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교육감 선거는 정당 선거가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교육환경을 개선할 정책을 두고 경쟁하는 자리다. 하지만 후보들은 ‘보수 대 진보’라는 프레임을 강조하며 이념이나 정치적 색깔을 부각하는 선거 전략을 펼치고 있다. 교육정책이 아닌 정치적 구호로 가득한 선거전은 결국 부산 교육의 미래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교육감 선거가 이념에 휘둘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학부모, 교사, 나아가 부산 교육 전체가 떠안게 된다.
보수 진영에서는 강성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 세이브코리아와 보수 유튜버들이 정승윤 후보를 지원하며 ‘부산시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도회’가 정 후보 캠프와 연계되기도 했다. 정 후보도 “보수 결집”을 강조하며 교육감 선거를 진영 대결 구도로 부각하고 있다. 진보 성향의 김석준 후보도 민주당 행사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하며 정치적 색깔을 강조하고 있다. 김 후보는 “극우에게 우리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정치적 선명성을 내세운다. 양측이 서로를 ‘극우’와 ‘좌파’로 몰아붙이며 정쟁을 벌이는 모습은 교육감 선거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향후 중도보수 진영 후보 단일화로 교육감 선거는 더더욱 이념 대결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후보들이 이념 대결에 집중하는 사이, 유권자들은 부산 교육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잃고 있다. 정작 유권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공교육 혁신, 학력 저하 해결 등 핵심 현안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 더 큰 문제는 이념 대결이 격화될수록 유권자들의 피로감은 커지고, 이는 투표율 저하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미 교육감 선거는 낮은 투표율로 대표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다. 2024년 서울교육감, 2023년 울산교육감 보궐선거에서 투표율이 모두 20%대에 그친 바 있다. 이번 부산교육감 선거 투표율이 20%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념을 앞세운 선거가 반복된다면 부산 교육의 미래는 더 어두워질 것이다.
최근 보수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지지 후보가 없다’거나 ‘모른다’고 답한 것은 이번 선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선거가 교육보다는 정치 논리에 매몰됐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후보들은 이념 공세를 멈추고 교육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며, 유권자들이 이를 비교·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번 선거는 부산 교육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다. 누가 더 보수적인가 혹은 더 진보적인가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누가 부산 교육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자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유권자도 이념이나 정치적 구호에 휘둘리지 말고 후보의 정책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
[논설위원의 시선] 인구 변화와 도시의 미래
2023년 영국 남자 신생아 이름 중 ‘무함마드’(Muhammad)가 가장 많았다. 무슬림 이민 가정이 선호하는 ‘무함마드’는 ‘노아’ ‘올리버’ ‘조지’와 10년째 선두 경쟁 중인데 2022년 2위에서 이듬해 1위에 오른 것이다. 다산을 선호하는 이민자가 전체 출생률에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데, 이 현상은 독일도 마찬가지다. 2023년 태어난 신생아 중 무려 27.8%가 이민자 가정에서 나왔다. 2016년 통계를 보면 독일인 여성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당 기대 출생아 수)은 1.45명에 불과했으나 이민 여성이 1.95명이었던 덕분에 평균이 올라가 합계출산율 1.59명을 기록했다.
유럽은 인구 위기에 선방하는 사례로 꼽힌다. 2023년 독일의 합계출산율은 1.35, 영국은 1.44, 프랑스는 1.68이었다. 히지만 이민자 변수를 감안해야 유의미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저개발 국가의 젊은이들은 교육과 일자리의 기회가 있는 선진국으로 몰리고, 늙어 가는 선진국은 젊은 피 수혈을 통해 성장 동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민자 유입이 없었다면 ‘합계출산율 1명’의 저지선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통계청의 지난달 26일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2024년 합계출산율은 0.75명이다. ‘찔끔’이긴 하지만 전년 대비 0.03명 증가했다. 부산(0.68명)과 서울(0.58명)은 특별·광역시 중 가장 낮았지만 역시 하락세를 멈추고 반전했다. 하지만 한국은 선진국에 비춰 보면 여전히 ‘국가 소멸’ 수준이다. 합계출산율이 1명 이하로 떨어지면 인구 반토막이 기정사실화되기 때문이다.
유럽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 세대의 구직 행렬은 인구 구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국도 유사 사례가 보인다. 2024년 출생 통계에서 경기도 화성시(1.01명)와 평택시(1.0명)는 일자리와 도시 성장의 상관관계를 실증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성은 2년 연속 인구 100만 명을 넘겨 올해 특례시로 승격했다. 인구 유출이 심화되면서 지난해 인구 110만 명선이 무너진 울산(0.86명)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첨단 미래 산업과 전통 제조업의 대비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찾아 젊은층이 몰리는 도시는 성장 가도를 달리지만 노인만 남은 도시는 쇠락 일로를 걷는다. 인구 구조 변화로 도시의 미래를 읽는다면 화성·평택과 울산은 양극단에 서 있다.
■ 일자리, 청년 세대, 출생률 선순환
서울 수서에서 경기도 평택으로 이어지는 고속철도 SRT 라인은 약동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전자, 현대모비스 등 굴지의 대기업 공장과 연구 시설이 평택과 용인, 화성에 들어서면서 일대는 상전벽해를 거듭했다. 용인은 꾸준히 인구가 늘어 109만 명으로 울산을 곧 제칠 기세다. 특히 화성의 성장은 눈부시다. 인구 19만 명의 화성군이 2001년 3월 화성시로 승격된 지 23년 만에 100만 명을 돌파하며 폭풍 성장했다.
비결은 일자리다. 화성 내 22개 산업단지에 반도체·자동차·바이오 등 첨단 미래 분야 2만 7000여 개 기업이 입주해 끊임없이 젊은 인재를 빨아들인다. 동탄신도시 등에 정주 여건이 갖춰지고 수도권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철도·도로 등 도시 기반 시설이 조성된 것도 한몫했다. 고임금 정규직 일자리를 찾는 전국의 취업 희망자들에 선망의 지역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 덕분에 주민 평균 연령은 39.3세로 낮아졌다.
2021년 기준 화성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91조 417억 원으로,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1위였다. 울산의 79조 7620억 원보다 높고 부산(106조 5100억 원)을 바싹 추격할 정도로 큰 경제권으로 부상했다. 반도체 벨트 조성 등 대기업의 투자 확대도 예정되어 있으니 취업자는 더 몰릴 전망이다. 일자리와 청년 세대, 출생률이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선순환되면서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농촌 지역이었던 화성은 20년 만에 전국에서 가장 젊고 활기찬 대도시로 성장했다.
■ 청년이 살기 힘든 도시
1인당 GRDP 전국 1위, 중산층 노동자 도시…. ‘대한민국 산업수도’라는 자부심 깃든 울산의 수식어는 이제 옛말이 됐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지만 알짜배기가 빠져나가면서 울산은 갈수록 기력을 잃고 있다. 주요 대기업이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를 고급 인재 유치에 유리한 수도권으로 이전한 탓에 생산 기지로 전락한 것이다.
지난해 발간된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대기업 주력 부문이 떠난 울산에서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 도시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진단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만 남은 지역에서 버틸 수 없는 청년 세대의 수도권 유출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청년이 떠나고 고령자만 남게 되니 도시의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울산은 좋은 일자리 덕분에 인재가 유입돼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좋은 일자리에 인재를 빼앗기는 신세가 되면서 쇠락하고 있다.
■ 일자리, 도시 흥망 좌우
대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 분야 일자리가 필수다. 미국의 노동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는 일자리를 매개로 도시의 성장과 쇠퇴를 연구했다. 모레티가 주목한 건 ‘승수 효과’와 도시 불균등 발전이다. 소프트웨어, 생명공학, 에너지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일자리가 1개 생기면 전문 및 비숙련 서비스 일자리 5개가 파생되는 ‘승수 효과’ 덕분에 도시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첨단 산업이 특정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커지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보스턴, 시애틀은 첨단 산업 덕분에 인재가 몰리고 번성하지만,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등 전통 제조업 중심 도시가 쇠퇴한 이유다.
화성·평택의 급성장이 설명되는 대목이다. 통계청의 ‘시군구 취업자수’ 통계를 보면 화성·평택에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일자리다. 화성의 2013년 상반기 취업자 수는 27만 3000명이었는데 2024년 상반기에 54만 7000명으로 곱절 증가했다. 평택도 21만 4000명에서 33만 7000명으로 큰 폭으로 성장했다. 일자리가 젊은 세대를 부르고 출생률도 높여 결국 도시의 활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확연하다. 일자리와 도시의 흥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 부산,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가려면
한국고용정보원 통계에 따르면 부산 청년 인구(15~29세) 비중은 2014년 6.69%에서 2023년 5.95%로 10년 내리 쪼그라들었다. 전국 17개 시도 중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청년이 살고 싶은 도시’ 구호가 참담한 대목이다. 부산이 광역시 최초로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유일하게 ‘소멸 위험’ 경고를 받은 상황과 동전의 양면이다.
부산의 미래 전략에 대한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글로벌 허브도시의 미래상은 첨단산업이 번성하고 청년 세대가 꿈을 펼치는 곳이다. ‘부산형 판교 테크노밸리’라는 청사진으로 추진되는 센텀2지구 도시첨단산업단지를 비롯해 부산이 전통 산업 대신 미래형 산업 유치에 적극 나서는 까닭이기도 하다.
부산은 화성·평택의 길을 지향하지만 발 딛고 있는 현실은 울산과 판박이다. 부산이 미래를 기약하려면 첨단 미래 기술 중심의 산업 구조 혁신을 이끌어 내야 하고 그 결과는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 부산은 소멸과 지속 가능한 도시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길잡이는 일자리다. -끝-
-
[밀물썰물] 임랑해수욕장과 어싱
조선 단종 2년(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임을랑포라는 지명이 나온다. 지금의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와 월내리 일대 해변을 합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임을랑포는 적을 방어하는 주된 성책이 있는 갯가란 뜻이다. 이곳 주민들은 예부터 바닷가 백사장 뒤편 아름드리 소나무가 즐비한 송림(松林)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波浪)에서 따온 임랑(林浪)을 지역 이름으로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두 가지 자연경관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지역명으로 삼았을까.
조선 후기 기장 지역의 빼어난 경치와 유적을 노래한 작자 미상의 가사 문학 작품인 ‘차성(車城·고려 때 생긴 기장의 별칭)가’에도 ‘임랑천에서 물고기 잡으며 놀다가 송림 위로 달 떠오르면 조각배 타고 달구경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구절이 있다. 특히 달빛이 비치는 호수 같은 임랑 앞바다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게다. 임랑해수욕장의 밤바다 월출과 윤슬이 자아내는 그윽한 정취, 조선시대부터 기장팔경에 꼽힌 이유다.
임랑해수욕장은 부산 7개 공설 해수욕장 중 하나다. 이곳은 도심에 가깝고 수많은 사람이 붐비는 해운대·광안리 등과 달리 근교에 위치해 한적하고 정감 어린 시골 해수욕장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번잡하지 않다. 이런 매력에 이끌려 임랑해수욕장에서 자연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관광객과 맨발로 걷는 어싱족이 늘고 있다. 총 길이 278.8㎞인 부산 산책로 갈맷길의 북쪽 시작점인 데다 주변에 가수 정훈희·김태화 씨 부부가 운영하는 ‘꽃밭에서’와 ‘웨이브온’ 등 크고 작은 카페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백사장 남단 입구 박태준(1927~2011) 전 총리의 생가 옆에 포스코 철강 신화를 창조한 고인을 기리려고 2021년 12월 개관한 기념관은 짧은 기간에 명소로 자리 잡았다.
오는 22일 오후 임랑해수욕장에서 ‘맨발 걷기 좋은 도시 부산,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부산시와 시의회, 부산상의, BNK금융, 부산일보사가 지난해부터 공동 개최하는 다섯 번째 행사다. 어싱(Earthing)은 자연친화적인 곳에서 발바닥을 지표면과 접지하는 맨발 걷기를 통해 심신 건강을 다지는 웰빙(well-being) 운동을 말한다. 당일 많은 이들이 길이 1.5㎞의 고운 백사장을 맨발로 거닐며 봄기운과 바다 풍광을 만끽하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이 행사는 지난해 해운대·광안리·다대포·송정해수욕장에 이어 오는 5월과 9월, 각각 일광·송도해수욕장에서도 마련될 예정이다. 강병균 대기자 kbg@busan.com
-
[데스크 칼럼] 북항, 춘래불사춘 퇴치법
부산에게 부산항은 무엇인가?
부산과 부산항을 향한 근원적 물음이다.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된 과정은 대략 이렇다.
부산항 없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부산에는 왜 변변한 부산항박물관 하나 없을까. 2007년 기본계획 고시부터 거의 20년이 다 돼 가는 북항 재개발지역은 왜 허허벌판일까. 부산역 뒤 충장로의 어지럽고 울퉁불퉁한 도로는 도대체 언제 깔끔하게 정비될까.
2020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이 분야 취재를 맡은 기자는 바뀌지 않는 부산항을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다 근본적 의문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안 바뀌나.’
북항 재개발 1단계 사업은 2022년 연말 기반시설 조성 공사가 마무리됐다. 분양 대상 부지와 도로, 공원 등이 완성됐고, 친수공원도 부분 개방했다. 탁 트인 바다와 거대한 부산항대교를 부산역 바로 앞에서 조망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며 시민들은 달라질 북항의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북항 재개발사업은 거의 중단 상태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조사가 이어지면서 사업 시행 주체인 부산항만공사(BPA)가 잔뜩 움츠러든 것이다. BPA 내부에서는 재개발 담당 부서가 최대 기피 부서라는 얘기도 들린다. 감사·수사에 따른 징계가 이어진 이후, 이 업무를 맡는 BPA 직원 입장에선 최대한 방어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BPA도 감사 대상 기관이기에 법규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위법한 사례가 있다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전례 없는 최초의 항만재개발사업을,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접목한 공기업이 담당한다는 점을 감사원이 얼마나 반영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자율을 부여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만으로 특혜와 불법의 올가미를 덧씌운 것 아닌가 곱씹어볼 일이다.
감사 이후 BPA는 땅을 분양받은 기업들에게 감사원 지적 그대로 ‘애초 사업계획대로 속히 착공하라’는 요구만 앵무새처럼 되뇌지만, 기업들은 거의 한목소리로 ‘10년 전 보름 만에 후닥닥 만든 사업계획안대로 무조건 착공을 독촉하는 것이 과연 사리에 맞느냐’고 하소연한다. 분양부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이 안 된 상태라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착공을 미루게 하는 요소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간 부문이 투자를 하려면 공공이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 그럼에도 애초 해양수산부와 BPA, 부산시 등 관련 기관과 공기업들이 북항을 채우겠다고 약속한 공공 콘텐츠는 기약이 없었다. 겨우 북항마리나만 문을 열어 수영장과 다이빙풀을 운영 중일 뿐, 오페라하우스는 여전히 공사 중이고, 단일 부지로 가장 넓은 랜드마크 부지는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중앙역부터 북항을 관통하는 트램 계획도 아직 계획에 멈춰 있다. 부산항박물관, 연안유람선터미널 부산항역사관 등도 마찬가지다. 땅만 만들었을 뿐, 시민 발길을 끌어들일 공공 콘텐츠와 인프라를 조성해야 할 공공의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만만한 민간 기업만 옥죄는 형국이다. 지난해까지 범정부 역량을 모아 희망을 걸었던 2030월드엑스포 유치가 무산되면서 엑스포 무대로 삼으려던 북항의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최근 콘텐츠를 개편한 북항 재개발 홍보관을 찾은 날은 초봄답지 않게 바람이 차가웠다.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옛말이 떠올랐다. 한낮 북항 일대는 겨울과 봄 사이 변덕과 혼돈 속에서도 평온했다.
더디긴 해도 BPA는 북항 공공 콘텐츠의 기능과 규모에 대한 용역을 올 상반기까지 마무리 짓고, 하반기부터는 각 시설에 대한 설계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용역 대상은 △IT영상지구 내 문화공원에 시민이 원하는 교양시설(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과 편의시설 설치 △연안여객터미널 리모델링 후 부산항기념관 조성 △유·도선장 적정성 검토 △북항마리나와 연계한 해양레포츠콤플렉스 조성 △재개발지역 내 교통체계 검토 및 개선안 마련 △현 BPA 부지 주변 연안유람선터미널 기본구상 수립 등이다.
내년이면 역사적인 부산항 개항 150주년이다.
오지 않는 봄을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다. 공공부문이 먼저 마중물을 신나게 부으면 활기는 살아난다. 때마침 북극항로니, 미국 해군함정 MRO(유지 보수 정비)·신조 추진이니 등 기대를 갖게 하는 소식이 잇달아 들린다. 한국 산업화의 견인차였던 부산과 부산항의 다가올 150년을 위해서라도, 과거와는 다른 열정과 추진력이 필요한 시기다.
-
[중앙로365] 미성년자와의 교제, 괜찮은가요?
한 유명 배우가 과거 상대가 미성년자인 시절부터 교제를 했다는 유튜버의 폭로로 연일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식당에서 뉴스를 보던 옆 테이블 사람들도 이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서로 좋아서 연애한 게 뭐가 문제냐"는 의견과 "성인이 미성년자와 사귀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반응이 팽팽히 맞섰다. 한 사람을 극도로 몰아가는 분위기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 논란을 계기로 미성년자와 성인의 교제에 대한 법적 기준과 사회적 책임을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
현행 형법은 13세 미만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으면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범죄로 본다. 이는 13세 미만인 경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0년 'N번방 사건' 이후 미성년자 보호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이 기존 13세에서 16세로 상향되었다. 13세 이상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행사하기 어렵다고 보고, 성인이 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 개정 당시에도 연령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으며, 이는 여전히 법적, 사회적 쟁점으로 남아 있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주로 SNS를 통해서 청소년과 성인이 알게 되어 만남을 가진 사례다. 두 사람이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맺은 경우, 통상 미성년자의 부모가 알기 전까지는 수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부모가 나서 형사고소를 한 경우에도 미성년 당사자는 적극적인 고소 의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미성년자와의 합의 하에 성행위를 한 경우, 피해자의 연령에 따라 처벌 여부가 정해지다 보니, 행위자들은 일단 피해자가 16세 이상인 줄 알았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심지어 피해 미성년자들에게 "나이를 속였다"고 진술해달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물론 성숙한 외모만 보고 상대방의 나이를 오인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필자가 대리를 맡았던 한 사건에서도 가해자는 피해자가 중학생인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CCTV 영상에서 피해자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며 법정 구속이 되었다.
특히 문제되는 사례는 청소년 간 교제 중 한 명이 성인이 된 경우다. 두 사람이 16세 미만일 때 교제를 시작했더라도, 한쪽이 19세가 되면 법적으로 성인-미성년자 관계가 되어 성관계가 있을 경우, 미성년자강간죄로 의제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보면서 일각에서는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연령을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있다. 미성년자도 성장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는데, 특정 연령을 기준으로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미성년자의 자율성과 인격권을 과도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령 기준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과 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특히 미성년자의제강간죄와 같은 성범죄에서 개인별 성숙도를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이를 허용할 경우 오히려 성범죄에 대한 법적 불안정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청소년과 성인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규제하거나,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고려하여 법을 개정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성인과 미성년자의 관계가 일정한 나이 차이 이내일 경우, 강간죄 처벌을 면제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조항'을 두고 있다. 비슷한 연령대의 청소년들 간에 합의된 성관계를 범죄화하지 않기 위해 마련된 법적 예외 규정이다. 영국은 16세 미만과 성관계를 맺을 경우 강력한 처벌을 내리며, 16~18세 청소년의 경우에도 교사나 보호자 등 권력 관계가 있는 성인과의 관계는 법적 책임을 묻는다. 프랑스 또한 15세 미만과의 성관계를 강간으로 간주하여 보호를 더욱 강화했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성적 동의 연령을 상향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단순히 연령 기준만 두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간 합의된 관계는 예외로 인정하면서도, 교사나 보호자 등 신뢰관계에 있는 성인에게는 더욱 엄격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차등화하는 흐름이다. 이러한 변화는 성인이 청소년을 성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청소년을 보호하는 법적 기준을 단순히 규제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청소년이 건전하게 성숙할 수 있도록 성인들이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이번 논란은 청소년 성 보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청소년이 올바른 성 가치관을 형성하고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
[시론] 산업은행 부산 이전, 페스티나 렌테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뜻의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는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일생 좌우명이다. 중요한 정책은 너무 서두르면 졸속이 되고, 너무 늦추면 성공에 결정적인 순간을 실기한다. 필자는 30여 년의 공직생활 중 가장 관심을 가졌던 정책분야가 국가균형발전이었다. 이 문제는 인구감소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중차대한 정책인 만큼 참으로 신중하게 준비하되, 서둘러 실행해야 하는 난제 중 난제이다.
국가균형발전이 성공하려면 지역에 기관과 자원을 나누어 주는 분산정책 수준을 넘어 지역의 혁신성장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기업금융, 투자금융, 혁신성장금융 그리고 국제금융 등 실물경제 발전을 토털 패키지로 지원하는 한국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정책은 침체일로에 있는 지역경제의 새로운 혁신성장 모멘텀을 창출하고, 국가균형발전을 일으키는 지렛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미 2년 전에 정부는 산업은행 부산 이전 효과에 대한 용역을 마쳤고, 균형발전위원회 심의를 거쳐 부산 이전 공공기관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한국산업은행 이전 공공기관 지정 고시문’도 공표하였다. 정부가 할 수 있는 행정조치를 완료한 만큼 빠르게 실행하는 단계만 남았다. 그러나 본점 위치를 ‘서울특별시’에서 ‘부산광역시’로 불과 다섯 글자만 바꾸면 되는 산업은행법 개정안은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심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800만 부산·울산·경남 주민들의 실망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더 이상 국회에만 이 문제의 처리를 맡겨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상공계를 중심으로 최근 조속한 산은법 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라는 실천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지역 이슈를 넘어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그동안 추진이 지지부진하던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논의에 본격적인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될 것으로 기대를 받아왔다. 2019년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은 2022년 정부의 국정과제로 포함되었지만 이후 수도권의 반대 여론과 일부 공공기관의 내부 반발로 아직도 구체적인 이전 계획조차 발표되지 못한 상태다.
이로 인해 지방소멸은 점점 가속화되고, 지방경제 활성화와 수도권 집중 해소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의지는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공공기관 이전을 통한 국가균형발전은 ‘수도권은 폭발 걱정, 지방은 소멸 걱정’ 현상을 해소하는 데 정부가 쓸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 수단으로, 과거 노무현 정부의 성공적인 체감 정책으로 평가된다.
30일 내에 5만 명 이상이 본인 인증 절차를 거쳐 동의해야 성립되는 이번 청원은 부울경 지역 주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지역 경제계를 비롯한 유관기관들의 참여 속에 21일 만에 5만 5284명이 동의해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이는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 단순한 공공기관 이전을 넘어 국가 생존이 걸린 국가균형발전의 중차대한 지렛대 정책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현재 국회에는 산업은행법 개정안 외에도 농협중앙회를 호남으로 이전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도 발의되어 있다. 많은 지자체들이 침체 늪에 빠져있는 지방경제를 위해 혁신성장의 모멘텀을 찾고자 하는 절박함으로 2차 금융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목을 매고 있다. 특히 부산은 광역시로는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에 포함된 만큼 비수도권 지역들과 연대하여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물론 2차 금융 공공기관 지방이전의 물꼬를 터 나갈 필요가 있다.
미국, 독일, 중국 등 우리의 경쟁 국가들이 제조업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있는 지금, 동남권 산업벨트는 여전히 대한민국 실물경제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동남권의 신산업 육성과 소부장 산업 스케일 업 그리고 금융중심지 활성화와 혁신 벤처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을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에 대해 국회는 우물쭈물 고민할 때가 아니다.
모든 일은 그 시기가 있다. 국회는 산업은행법 개정안을 빛보다 빠르게 처리하고 지역경제를 살리는 데 바람처럼 세게 행동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국회가 그 존재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동남권 800만 주민들은 국회의 현명한 응답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
[다른 시선으로] 민주주의는 목숨이다
민주의 꿈은 높고 크다. 누구나 위정자를 투표해 선출할 수 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시위로, 전쟁으로, 피로 얻어낸 성취다. 왕의 손아귀에서 민의 권리·의무를 해방시킨 근대 시민혁명과 맞물려, 힘센 나라와 힘 약한 나라의 위계는 그 민의 권리·의무를 또 한번 가로막았다. 오늘날 국제 사회에 통용되는 인권은 탈식민 민족의 자결권 개념에 크게 빚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써있는 3.1운동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지 않은 민주공화제와 민족 자결의 원칙을 조용히 웅변한다.
제국주의로부터 놓여난 탈식민 국가가 한번 세워졌다고 민주의 꿈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전제군주정과 신분제가 그랬듯이, 어떤 그룹의 인간이 다른 그룹에 비해 열등하고 그들에게 제한된 자유와 평등을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류사에 뿌리깊다. 민족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세워진 나라에서조차 그런 차별의 생각은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 그중 대표적인 차별의 근거가 바로 성별, 즉 젠더다. 젠더는 세상 많은 실질적 차별의 뿌리이면서 다른 사회적 차별의 은유로 활용된다. 과거 많은 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피식민국을 여성으로 비유했다.
구조적 차별은 차별하는 그룹과 차별받는 그룹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활용한다. 가령 남성과 여성이 전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그 사이에 가로놓인 차별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식으로 활용된다. 남성과 여성이 애초에 다르다는 말은, 그 사이에 가로놓인 차별에 근거를 달아주고 그 구분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밑밥으로 사용된다. 일견 모순돼 뵈는 이런 전략은 인간 사회에 의외로 흔하다. 일제 강점기 민족 차별에 시달리던 일본인과 조선인을 저 동일성과 차이의 도식에 대입해도 얼추 들어맞는 것이 그 예다.
오늘날 민주의 꿈 가운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있다. 신과 깨달음 앞에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고등 종교 경전의 수려한 문구를 제쳐두고, 사람을 차별해도 좋다는 그 속의 몇몇 구절과 전승을 종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호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종이다. 민주의 원칙이 그 어느 때보다 위협받는 이 때,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포함된 비상행동 공동의장단의 단식이 2025년 3월 19일자로 12일을 맞이했다.
차별받는 이들에게 반차별이란 밥이자 목숨이다. 그 밥과 목숨을 향한 길이 때로 밥과 목숨을 잠시 떼어놓는 싸움을 통해야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슬픔이다. 그 슬픔을 딛고 도달할 싸움의 승리는 3.1운동을 이마에 써놓은 대한민국 헌법이 증거한다. 민주와 반차별은 우리가 걸어온 역사가 저도 모르게 아로새긴 예정된 미래다.
-
[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독재자가 싫어한 그림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건축물과 풍경화를 곧잘 그렸다. 그는 스스로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빈 조형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두 차례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학교 측은 그가 인물화 실력이 부족해서 미술가가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이후 그는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그는 자신의 책 〈나의 투쟁〉에서 빈 시절에 미술대학 진학 실패의 경험이 정치적 신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 바 있다. 히틀러가 미술대학 진학에 성공했더라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이력을 가진 히틀러의 눈에 훌륭한 예술 작품이란 전통적 아우라적 예술 작품이었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전통적 아우라적 예술 작품은 아름답게 묘사된 대상을 통해 관객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주목하기를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관찰자는 그 예술 작품에 몰입해 빠져들고 그만큼 상대적으로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을 놓치게 된다. 그리하여 관찰자는 비판적 사고를 결하게 된다.
권력을 잡은 나치와 히틀러는 구상적이고 영웅적인 형상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미술을 위대한 독일 예술로 칭송했다. 고전적인 여성 누드를 통해 자연의 4가지 원소(불, 물, 공기, 흙)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치글러의 ‘4원소’가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였다. 이들 그림에서 여성들은 전통적인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묘사되었고, 순수한 아리아인의 신체미를 이상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전’에 작품이 내걸리면서 모욕을 받은 작가들은 모두 112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 미술이라고 지칭한 모더니즘 미술가들이었다. 다리파와 청기사 등의 표현주의(에밀 놀데, 에리히 헤켈, 키르히너, 프란츠 마르크), 사회 비평 그림(막스 베크만,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스), 바우하우스 예술가들(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라슬로 모호이너지)이 포함됐다. 그 외 마르크 샤갈, 오스카 코코슈카, 케테 콜비츠, 막스 에른스트, 하울 하우스만, 쿠르트 슈비터스, 피카소, 몬드리안 등 기라성 같은 이름이 줄줄 이어진다. 조각가로는 빌헬름 렘브루크, 에른스트 바를라흐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전통적 재현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형태와 색채를 왜곡한다. 나치 독재자의 눈에 이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미의식을 심어주고 그 때문에 질서를 어지럽힐 뿐이다. 한스 에릭 노사크에 따르면 나치 집권자의 ‘본능’은 아주 정확했다. 나치 독재자가 형태와 색의 왜곡에서 찾아낸 것은 ‘자주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 자주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집권자가 제시하는 특정 이념을 공염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
[사설] 마사회 부산·경남 무시에 레저세 300억 날릴 판
건전한 경마문화를 창출하고 부산·경남지역 발전과 지방재정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문을 열었던 부산경남경마공원이 마사회의 꼼수로 인해 개장 20년만에 건전한 경마문화 창출은커녕 지방재정 결손까지 초래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했다. 마사회는 경마가 사행심을 초래하는 산업으로 변질돼 사회적 해악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마사회가 내세운 목표를 믿고 지역에 경마공원을 유치한 지역 주민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이익만 추구함으로써 ‘사행’을 넘은 ‘사기’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실에 따르면 마사회는 지난해 12월 부산경남경마공원(부경공원)의 경주마를 영천경마공원(영천공원)으로 옮겨 경주를 한다는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마사회가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내년 9월 개장하는 영천공원의 경주마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서’이지만 이에 따른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경주마 유출로 부경공원은 경주를 줄일 수밖에 없어 한해 최대 536회까지 경주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이는 부산·경남의 레저세 감소로 곧장 이어질 전망이다. 마권 발매 총액의 10%에 해당하는 레저세의 부산·경남지역 규모는 한 해 1000억 원을 웃돌지만 경주마 유출로 한 해 300억 원 이상의 레저세 결손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레저세 결손만 우려되는 것이 아니다. 마사회는 이 같은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부산·경남과 사전 협의 없이 계획 확정 직전이 돼서야 내용을 통보했다. 부산·경남 경주마 수급에 영향을 미칠 사안을 경북·영천과 몰래 ‘짬짜미’로 진행시켰다는 뜻이다. 경북·영천이 마사회에 30년 동안 레저세 50% 감면을 약속했다는 점으로 미뤄 볼 때 레저세 절반을 챙기겠다는 마사회의 잇속이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마사회는 경주마 수급에 꼭 필요한 마주의 승인을 받기 위한 조치조차 취하지 않았다. 부경공원 경주마 수급 계획이 처음 나온 2018년부터 8년 동안 마주협회와 단 한 차례의 협의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부산·경남 쪽과 접촉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의뭉스러운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마사회 측은 “협의는 하겠지만 현재로선 기본계획 변경 계획은 없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사행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레저세를 통해 지역 재정에 일조하면서 건전한 경마문화를 조성하겠다며 설득하던 20년 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태도에 지역사회는 분노하고 있다. 당장 부산·경남 마주협회가 마사회의 행위를 규탄하면서 영천공원 쪽 경마에는 부산·경남 경주마 참여를 일절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초심을 잃고 지역사회를 배제하는 ‘사기’에 가까운 행각을 계속한다면 ‘사행’성 산업의 폐해에 대한 지역사회의 본질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
[사설] 고준위특별법 시행 영구처분장 구체적 로드맵 세워야
원전 가동으로 발생하는 사용후 핵연료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영구 처분하는 시설 마련이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고준위특별법)이 18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기 때문이다. 고준위특별법은 오는 2050년까지 사용후 핵연료의 중간 저장시설을, 2060년까지 영구처분장을 각각 확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써 고준위 방폐장을 건설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고 방폐장 확보의 목표 시점이 제시된 것이다. 방폐장 건설이 사실상 출발점에 선 셈인데, 앞으로 하루빨리 촘촘하고도 실효성 있는 로드맵을 만들어 속도를 내는 일만 남았다.
국무회의 통과로 공포 후 6개월 뒤 시행될 예정인 고준위특별법에는 사용후 핵연료 중간 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을 목표 연도까지 마련하기 위한 부지 선정 절차가 명시돼 있다. 부지 선정을 위해 기초지자체의 신청, 기본·심층 두 단계의 적합성 조사, 주민 투표를 거치도록 했으며 유치 지역과 주변 지역에 특별지원금 등 폭넓은 지원이 이뤄지게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절차라는 게 정부 측 설명이지만, 이제서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의 실마리를 찾아 만시지탄이다. 1978년 고리원전 1호기의 상업 운전 이후 47년 넘도록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마련하지 못해서다. 2005년 경북 경주에 주민 투표를 통해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만 확보했을 뿐이다.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할 때 중간 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 확보 시점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는 정부가 1983년부터 그동안 모두 9차례에 걸쳐 방폐장 부지 확보를 추진하고도 대규모 혐오시설로 인식한 지역민들의 강한 반발이나 님비 현상 탓에 성공하지 못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정부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세세한 부지 선정 기준과 의견 수렴 절차, 지역민 지원 방법 등 주요 사안에 대해 전문가는 물론 국민들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하위 시행 법령과 규칙에서 꼼꼼히 보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방폐장 목표 시점에 맞춘 구체적인 진행 일정과 사안별로 빈틈없는 대책, 지역민 설득 방법 등을 담은 로드맵을 마련해 신속히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
국내 원전들의 사용후 핵연료 임시 저장은 한계에 봉착한 지 오래다. 각 원전의 사용후 핵연료 저장률은 2026년부터 줄줄이 포화상태를 맞이할 것이란 예측도 나왔다. 정부가 고준위특별법 통과에 따른 후속 조치를 원활히 이행해 방폐장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이유다. 게다가 방폐장 부지 선정과 건설에 차질이 생길 경우 원전 내 임시 저장시설 확대로 이어져 영구처분장화할 우려가 있다는 원전 주변 주민들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정부는 원전 밖 다른 지역의 영구처분장을 마련하지 못하면, 원전 가동이 중단될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국민 홍보와 설득을 병행하며 방폐장 확보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
[강윤경 칼럼] 지역 의사 서울 여자 만나 떠날까 걱정이라니!
세간에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는 연예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SOLO)’의 한 남성 출연자 이야기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25기의 ‘광수’는 자신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일반 의사로 소개했다. 지역 유일의 개원의라고 밝힌 그는 하루 평균 100명, 지난해 2만 6000명의 환자를 봤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나는 SOLO’ 출연에 “동네 분들이 서울 여자 만나 인제를 떠날까 걱정하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을 떠날 수 있냐”는 여성 출연자 질문에 “저밖에 없어 자리를 비울 수 없고 주말에만 연애가 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광수’의 사연이 화제가 된 것은 의사 한 명에 운명이 달린 지역의료의 열악한 현실을 소환했기 때문이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위태위태한 곳이 어디 인제뿐이겠는가. 지금은 의대 신입생 숫자놀음에 정부와 의료계 감정싸움만 남은 걸로 보이지만 애초 의료개혁의 출발점도 지역이었다. 경남 산청군 보건의료원이 내과 전문의를 구하기 위해 3억 6000만 원 연봉에 다섯 차례나 채용 공고했지만 무산됐다는 사연이 알려진 게 2023년이다. 그즈음 산청군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고액 연봉으로 애원해도 의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례가 사회적 이슈였고 이는 윤석열 정부 의료개혁의 명분이 됐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발표하면서 지역의 필수의료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의지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헬기 서울 이송에서 봤듯이 제2 도시 부산의 응급의료 수준마저 무시당하는 게 지금의 우리 의료 현실이다. 정부가 의대 증원의 대부분을 비수도권 대학에 배분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로 시작된 의료개혁은 의정 갈등과 의료 공백에 따른 환자 고통만 가중한 채 사실상 정부의 백기 투항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열악한 지역의료 현실은 나아지기는커녕 붕괴 속도만 더 빨라지는 형국이다. 읍면보건소 등 의료 취약지역에 근무하는 공중보건의만 해도 2022년 1309명이던 게 2024년 716명으로 줄었다.
의정 갈등의 와중에도 의료의 수도권 쏠림은 더 심화하고 필수의료 공백에 따른 타격도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국 인턴·전공의 1672명 가운데 1097명(65.6%)이 수도권 병원에서 근무 중으로 비수도권의 2배에 육박했다. 정부는 전공의의 비수도권 비율을 상향해 수도권과 5대 5로 맞추겠다고 공언했지만 격차는 전공의 사직 사태 이전보다 더 벌어진 것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정부가 2026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약속하며 의대생과 전공의 복귀를 호소하고 있지만 꿈쩍도 않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따라 넓어진 문으로 진입한 2025년도 의대 신입생까지 수업 거부에 동참하는 현실은 의료개혁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꺾게 한다. 이들은 의대 증원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는 점을 알고도 지원했다. 정부 정책의 수혜 속에 입학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명분으로 정부 정책을 이유로 수업을 거부한다는 말일까. 이런 현실에서 ‘광수’와 같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지역을 지키는 의료인을 앞으로 볼 수 있을까.
2년째 이어지는 의정 갈등은 이제 파국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의료인 양성시스템이 붕괴되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의료계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17일 서울대 의대 일부 교수가 제자의 복귀를 호소하며 성명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최근의 전공의·의대생 집단행동과 관련해 환자에 대한 책임도, 동료에 대한 존중도, 전문가로서의 품격도 찾아볼 수 없다고 개탄했다. 의사 면허 하나로 전문가로서 대접받으려는 모습도 오만하기 그지없다고 직격했다. 의료시스템 개선을 위한 로드맵도, 설득력 있는 대안도 없이 1년을 보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제자들에게 궁극적으로 바라는 게 정부를 반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의료를 개선하는 것인지 물었다. 현재의 투쟁 방식과 목표는 정의롭지도 않고, 사회를 설득할 수도 없어 보인다며 결단을 촉구했다.
이들 교수의 지적대로 의정 갈등의 진짜 피해자는 의사가 아니라 지난 1년 동안 외면당하고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이다. 그 가족들이다. 의료개혁이 단순히 의사 숫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젊은 의료인들의 문제 제기도 이제 많은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파국을 맞기 전에 대학으로, 환자들 곁으로 복귀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의료개혁 파행이 이공계 교육과 국가의 미래마저 망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어서야 될 일인가.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
[밀물썰물] 모바일 주민증
‘이제 남은 반백과 희미해진 지문 앞에서,/손 흔들 사이도 없이 빠져나간 시간 앞에서,/나라고 외치는 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지상에서 나의 기거를 증명해온 기록이여/숨 가쁘게 달려온 내 삶의 향방이여/수십 번 넘어지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이여.’ 이우걸 시조시인의 ‘주민등록증’이란 시다. 시에 나오는 것처럼 주민등록증은 개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징표다.
주민등록증의 역사는 1950년 6·25전쟁 무렵으로 올라간다. 당시 각 시도에서 발급한 시·도민증이 주민등록증의 전신이다. 시·도민증에는 본적, 출생지, 주소는 물론 직업, 신장, 체중, 혈액형까지 적혀 있었다. 1962년 주민등록법이 만들어졌지만, 주민등록증은 1968년에 탄생했다. 그해 1월 21일 청와대를 급습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계기가 됐다. 1·21 사태 이후 정부는 주민등록법 개정을 서둘렀다. 주민 동태를 파악하고 간첩이나 불순분자 색출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1968년 11월 21일부터 주민등록증이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발급되면서 시·도민증은 폐지됐다. 이때 주민등록증은 가로가 아닌 세로 형태였고, 번호는 12자리였다.
1975년 주민등록증의 주민번호는 13자리로 바뀌었고, 발급 대상자 나이도 18세에서 17세로 낮아졌다. 당시 주민등록증은 종이를 코팅해서 발급해 물에 젖을 때 훼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위·변조가 쉽다는 문제점이 지적돼 1999년 9월 플라스틱형 주민등록증으로 변경됐다. 정부는 2006년 위·변조 방지 강화를 위해 형광인쇄 기술을 적용했다. 2020년 1월부터 주민등록증 재질을 폴리염화비닐에서 폴리카보네이트로 교체하고 위·변조 방지용 장치를 추가했다.
지난 14일부터 부산을 비롯한 전국의 주민센터에서 모바일 주민등록증 발급이 시작됐다. 1968년 주민등록증 탄생 이후 57년 만에 모바일 발급 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세종 등을 시작으로 모바일 주민등록증 발급 지역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왔다. 스마트폰으로 발급받는 모바일 주민등록증은 실물 주민등록증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갖는다. 생활 속 편리가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관공서, 병원, 투표소에서 사용하고, 계좌 개설 등 모바일을 통한 비대면 서비스에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암호화 등 보안 기술도 적용됐다고 하니 안심이 된다. 모바일 운전면허증, 국가보훈등록증에 이어 모바일 주민등록증까지 발급되면서 일상의 디지털화는 대세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
-
[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교육혁신이 도시를 젊고 새롭게 바꾸려면
오늘날 전 세계 도시들은 경제 침체, 인구 감소, 산업 변화 등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들은 다양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교육혁신이 도시 활력을 되살리는 핵심 요소로 주목받고 있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도시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며,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교육혁신이 기존에 강점이 있었던 산업과 맞물렸을 경우에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휴대전화 제조기업인 노키아 중심의 산업도시였던 핀란드의 오울루가 노키아의 쇠퇴 이후 도시의 침체를 교육혁신으로 극복한 사례다.
노키아의 고향 오울루의 극적 변신
지역에 걸맞은 교육혁신이 그 바탕
해양항만 인프라 강점 보유한 부산
산업 맞춤 교육혁신해야 도약 가능
1980~1990년대 오울루는 노키아의 핵심 연구개발(R&D) 센터가 위치한 도시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노키아는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는 시장변화에서 애플과 삼성에 밀리며 2000년대 후반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고, 그 결과 오울루의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실직하면서 지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울루대학교 중심으로 정보통신(IT) 관련 교육 및 연구를 강화했고, 오울루시와 기업이 협력하여 소프트웨어 및 ICT 관련 창업을 지원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기술 창업 교육을 제공해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했다. 그 결과 핀란드는 이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IT·게임·헬스테크 스타트업 허브 중 하나가 됐다. 현재 700개 이상의 기술 스타트업이 오울루에서 활동 중이다. 그 중심에는 오울루대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교육혁신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질 때 사상누각이 되기도 한다. 2000년대 후반, 디트로이트는 제조업 쇠퇴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자,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중심 교육 개혁을 추진했었다. 고등학교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IT·기술 직업교육을 확대해 자동차 산업 쇠퇴 이후 도시의 산업생태계를 주도하는 것이 인재 육성의 목표였다. 그러나 지역의 산업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IT교육 일변도의 교육개혁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취업할 곳이 없어 대도시(샌프란시스코, 시카고)로 유출되는 현상을 만들어 내고 말았고, 결국 실패했다.
이와 비슷한 실패 사례가 중국의 둥관에서 있었던 교육혁신을 통한 도시재생 시도다. 둥관은 중국의 대표적인 제조업 도시였으나, 2010년대 후반 첨단산업 전환을 위해 교육개혁을 추진했다. 공업 기반을 넘어 AI, 반도체, 첨단 기술 산업을 키우기 위해 관련 전공 개설 및 기업-대학 협력을 강화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기존 둥관의 저임금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첨단산업으로 전환할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AI·반도체 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AI·반도체 관련 고급 인재들이 대거 필요했으나, 둥관에는 높은 수준의 대학과 연구소가 부족했다. 그리고 지역 내 AI·반도체 산업생태계가 존재하지 않아서 둥관의 대학 내에서 이루어진 AI·반도체 인재 양성은 지역 기업과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 도시 부산에서 교육혁신이 도시의 재도약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관련 산업과 교육의 인프라가 부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우라야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크다. 부산은 해양·항만 인프라, 조선·해양기자재 산업, 해양수산업 등 다양한 해양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해양 관련 교육인프라에서는 국내 다른 지역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성장과 국제적 위상 강화를 위해서는 여러 도전과제가 존재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학-산업체-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을 통한 전략적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부산항은 국내 컨테이너 물동량의 76.8%, 특히 환적 물동량의 97% 이상을 처리하며, 2015년 이후 세계 환적 2위 항만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재 항만 운영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터미널 대형화 및 스마트 항만 구축이 필요하다. 또한 항만 및 선박의 친환경성이 강화되는 현재 상황에서 관련 산업에 대한 대학-산업체-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을 통하여 R&D 혁신의 성과를 내야 한다. 부산이 강점을 가져온 수산업도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 축산업의 온실가스 배출을 절감한다는 목표에서 다시 주목받을 필요가 있으며, 노르웨이 등 수산업 선진국에 비해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부산의 관련 산업 노후 인프라에 대한 정비와 이를 위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시베리아 지역 및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알래스카에서 개발되는 천연가스가 시장으로 도입되기 위해서는 극한 환경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하고 이를 운송하는 조선해양산업에서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산이 강점을 가진 분야의 교육혁신이 지역 내 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전략적 지원과 접목돼 부산이 다시 우수한 청년 인재들이 꿈을 펼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
[오늘을 여는 시] 갑오징어와 을오징어
둘은 일관된 앙숙이었다. 둘이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삼자가 나섰다. 제삼의 인물은 어느 편도 들 생각이 없었지만, 이쪽을 만나면 이쪽에서 저쪽을 만나면 저쪽에서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쪽은 이쪽대로 옳은 말이고 저쪽은 저쪽대로 사정이 있었으니 둘 다의 말을 종합하면 어느 쪽도 만족할 만한 말을 들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말이 너는 누구 편이냐? 둘 중 하나만 택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그는 일관되게 제삼자였다. 소주 한 병에 오징어 두 마리면 충분한 사람이었다.
시집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2018) 중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쓸 때마다 언제나 ‘을’이었던 나도 누군가에게 ‘갑’질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자들이 화해의 물꼬를 터주려는 자에게 어느 쪽인지 채근하는 것도 어쩌면 폭력 아닐런지요.
편 가르기, 그것만이 풀어야 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개개인의 의사나 능력이 반영되지 않는 갑과 을.
세상에 대한 태도나 삶에 대한 방향이 하나의 방법이나 태도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게 옳은지 아닌지 고민스러워집니다.
번번이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제삼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벼워 물에 뜨는 갑오징어의 패각으로 배를 만들어 놀았던 어릴 적 생각이나 합니다. 신정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