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의 오이디푸스들
세계를 정(正)·반(反)·합(合)의 관계로 설명하려던 시절이 있었다. 이 변증법적 세계관은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탈을 쓰며 '얼마 전까지'는 별 무리 없이 잘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금 세계관에 예전의 변증법적 세계관을 도입하기에는 어딘지 헐겁게 느껴진다. 이전의 세대론이 '세계와 세계의 갈등'과 '세계의 이원화 및 분리양상'이라고 할 때, 현 세대의 세계관은 독자적인 알레고리에서 벗어난 형태를 띤다. 이는 두 세계가 독자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하는 견지가 유기적 결합으로 나아간 것을 이른다.
구(舊)오이디푸스가 운명의 저주를 피해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의 왕이 되어 결과적으로 운명에 뒤섞인 것에 반하여, 신(新)오이디푸스들은 코린토스에 남아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를 죽이고 왕비 메로페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운명에 순응하고 말았기에 새로운 비극이 탄생했다. 세계(운명)의 실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세계라고 하는 괴물의 거대한 실체를 바라본 뒤 자신이 운명에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일찌감치 깨달은 신(新)오이디푸스들은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아이러니한 자기파괴에 다다른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한계 체감 속에서 문학의 지위도 변해갔다. 세계와 대립하기만 해도 문학적 의의가 인정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세계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은 정보의 유입과 함께 안갯속에 숨어 있던 정체를 드러냈고, 위악적인 체념의 문학-루저(Loser) 문학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정보를 통한 세계의 유기성과 변증법의 몰락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신(新)오이디푸스는 어떤 비극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전에는 없었던 정보의 범람은 현 패러다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2. 현대 젊은이들의 초상
편의상 아이의 세계를 A, 어른의 세계를 B로 설정하자. 과거에는 '대부분이 빈곤한 평등 상태'에 놓여 있기에 독자적인 세계구성이 가능했다. 상황의 외적 갈등(A로서는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하지도 않는 B의 세계)이 없기에 A는 독자적인 세계를 간직한 채 자연스러운 전개로 세계의 이원화가 가능해졌다. 이때의 세계는 아직 개인의 역량에 따라 자원의 분배가 이루어지며, 이는 빈곤의 문제가 개인의 노력 여하와 인식에 따라 규정되는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의 '빈곤문화론(Culture of Poverty)'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세계의 연장에서 일어난다.
이후의 세계를 각각 A2와 B2로 생각해보자. 이 때, A2의 세계는 해당 숙주의 세계인 B2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이 세계는 형평성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B2내부의 역학관계가 A2의 세계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여기서 차츰 유기성이 생겨난다. 여기에서 세계인식을 시작하는 세대는 역학관계 하위에 놓인 B2세계를 배경으로 한 A2의 세계이다. 역학관계의 불평등을 인식한 A2의 세계는 더는 루이스의 이론으로 설명되는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레그나 누르크세(Ragnar Nurkse)의 순환이론 속의 세계이다. 빈부갈등의 확장은 A2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문제는 빈곤의 '인식'이 가능한 A2가 수적 우위에 섰을 경우다. 이 접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데에는 유기성, 즉 세계인식에 대한 정보가 작용한다. 그렇다면 정보 범람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현 세대, 즉 A3와 B3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전석순의 '철수 사용 설명서'는 지금의 세대-현대의 '젊은이'들의 자기인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입시지옥 속에서 교육의 형평성이 깨어졌다고 하는 자기인식, 그 이면에는 부의 선천적 분배가 자리 잡고, 이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 2000년대 젊은이의 초상이다. 세계를 메커니즘 화하고 자신도 메커니즘 화한 세계 속에 편입하려는 철수의 의식 자체는 현대의 젊은이를 대변한다고 본다. 이 친절한 사용설명서 속에서 철수는 부디 세계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러한 체념적 과잉현존은 현 세대의 패러다임을 대변한다. '과도한 실존적 무게'를 짊어진 젊은이의 생존방식은 미성숙한 자기 방어본능의 확장이며, 키덜트적인(kid가 주체인 Kidult) 모습이다.
키덜트(Kidult)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피터 팬 증후군'으로 대변되는 아이 같은 어른이고(adult가 주체), 하나는 어른 같은 아이(kid가 주체)다. 한 단어 속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전자가 '알을 깨지 못한 어른'의 독립적 세계라고 할 때, 후자는 지나치게 빨리 '알을 깨고 나온 아이'의 유기적 세계를 뜻한다. 헤르만 헤세의 '알깨기 이론'은 세계의 독립성과 유기성을 상징한다. 생물학적인 구분이 아닌, '철이 들었다'로 대변되는 정신병리학적 대상의 구분은 '자아와 세계의 유기성 인식' 여부에서 나타난다. '아이인 어른'과 '어른인 아이' 어느 쪽도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만, 경계의 과도기에 나타나는 세계 인식 문제는 현 세대의 특성과 동떨어지지 않는다. 현 세대의 특징은 이러한 키덜트적 세계관의 연장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세계인식은 네트워크의 접점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이러한 빈곤의 인식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교인식에서 출발하는데, 이 비교의 본질은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추후의 세계가 개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선천적 요소 탓에 자원의 분배가 이루어진다고 인식하는 세계 속에서는 개인의 자아에 일찍이 초식동물의 단념을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먹이사슬 아래에 있다는 자기인식은 외적 허브의 유입(이를테면 혁명 등 자신이 구축한 세계관의 인식을 넘어서는 천재지변)이 불가능한 상황(트랜스내셔널 시대에 이른 지금 현 상태에서는 국가적 허브 전복이 일정 집단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린다)하에서는 자아를 자포자기식의 위악, 체념 상태에 머무르도록 한다.
소설 속 철수가 세계에 맞춰 자신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소극적인 모습은 아이가 부모의 요구사항에 맞춰 자신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 것의 연장이다. 자아가 미성숙한 상태에서 세계의 존재를 깨닫게 된 철수들은 아이들과 같은 본능으로 생존의 처세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전의 세계관에서는(즉, A2와 B2의 세계관) 이러한 키덜트적 인식이 개인의 특수성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그다음 세대가 될 때, 즉 A2가 B3이 되었을 때 문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B3를 숙주로 삼는 A3의 세계에서는 불평등이 심화한다. A3는 교육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선천적인 재화의 보유에서도 불평등을 인식하기 시작하며, 이러한 정보의 유입은 A3가 더는 B3의 세계와 이원화될 수 없다는 인식, 즉 두 세계의 상호유기성 인식으로 확장된다.
다양성을 부정하고 존재 이유를 단일한 설정 속에 규정하는 비극성에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미성숙한 자의식의 확장이 전제한다. 출시되는 전자제품처럼 인간에게 사용설명서가 존재해야 한다는 발상은 휴머니즘의 상실이고, 결국은 근원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의도적인 피상성으로 그 물음을 회피하며 자신을 방어한다. 이는 '철수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모습'과 그 맥락이 맞닿는다.
'사용 설명서'를 읽고 이해를 바라는 것조차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가 있다 하더라도 세계는 결코 철수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하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두가 세계(운명)의 탁류에 몸을 내맡긴다. 사회 시스템이 그렇기 때문이다.
3. 사회 시스템이 낳은 백수들
한재호의 '부코스키가 간다'는 백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은 "어딘지 내 얘기"같은 이야기이다. 청년실업이 화두로 떠오른 2000년대 말, '백수'는 더는 희화화의 대상으로서 '타인'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백수는 있었다. 다만, 이전 시대의 백수들은 특이한 경우였으며 위악적 태도를 보이는 기인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이에 반하여 지금 백수들은 '매우 평범함' 그 자체이며 더는 이질적인 존재로 타자화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나'의 모습은 할 일 없는 백수의 일상에 대한 알레고리일 뿐이다. 부의 문제는 아직 개인의 역량이 밑받침된다는 인식이 가능했기에 A3는 부의 문제보다도 불가항력에 가까운 외적 허브인 정치권력의 문제로 시선을 둔다. 실제로 이는 시민운동, 학생운동 등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기틀이 마련된 상태로 이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의 역학관계를 돌파한 A3세대를 맞이한 것은 국제적 역학관계가 부의 문제와 맞물린 IMF 사태였다. 생존의 문제가 더욱 거대한 외부 허브에 있다는 인식은 A3의 기를 꺾어놓게 된다. 이는 인지하는 세계의 확장이다. 이제 부의 문제는 다시 개인의 차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젊은이들은 이미 누르크세의 세계관 속에 편입되어 그 어떤 외부적 허브도 끌어올 수 없게 되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자신에게 극적인 변화가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한 것이다. 백수인 나에게 구직활동보다 더 중요한 일상이 되어버린 '부코스키 쫓기'는 역설적이며 일탈적이고 비일상적이지만 필연적이다. 이러한 필연적 일탈에는 백수들이 직시하고 있는 '삶의 문제'에서의 회피, 달아나고 싶은 욕망이 비이성적인 형태로 분출된다. 소설 속 '부코스키'는 무의미하다. 부코스키를 뒤쫓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 기묘한 꼬리잡기 스토킹은 또 다른 일상이 된다. '나'를 쫓는 누군가가 생기고 나서부터 게임은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이는 나를 관찰해주는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주는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쓸모없다고 여기던 자책이 이 게임을 통해 해소되어 가고 있다. 게임을 통해, 내가 누군가에게 관찰당한다는 인식을 통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닌다고 여기던 자아와 세계의 융합을 체감한다.
우리는 게임이 프랙털처럼 뻗어갈 것임을, 뻗어 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나'가 쫓는 것은 부코스키였던 동시에 누군가는 부코스키인 나를 쫓고 있더라는 패러독스 구조. '나'가 몰두하는 이 무의미한 추격, 결국 '부코스키'도 누군가를 추격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와 내가 부코스키가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소설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소문이란 건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그 허위의 태반은 쓸모없는 것,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무위에 대한 소설이다. 무위에 대해 말하는 무위한 일상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계속 넘어지고 실패하고 일어설까 망설이다가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는 젊은이의 이야기다.
그런데 부코스키가 내가 되는 이 상황이 세대의 연장으로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4. 늙은 어린이들에게
바야흐로 정보 과잉의 시대다. 미디어와 인터넷이라고 하는 네트워크 정보 시스템의 확장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시대를 만들었다. 시대의 변화는 세대의 변화를 불러온다. 세대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기득권의 인식 왜곡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이제 와서는 진부하기까지 한 신·구세대의 변증법적 대립이 현 세대에 이르러 그 궤를 조금은 달리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정보의 과잉'이다.
한 이데올로기가 죽은 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뒤, 생존의 대가인 재화만 덩그러니 남은 세계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신(新)오이디푸스들은 아직 채 여물지 못한 상황에서 알을 깨고 바깥 세계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성향은 고대의 무지에서 비롯한 노예적 체념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이러한 자기 체념의 논리는 역할모델 상실에 비롯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본이 존재를 대변하게 된 패러다임의 시대에 젊은이들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재화를 강 너머 존재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약한 개인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빈곤의 윤회 속에서 자신이 더는 어쩌지 못할 거대한 세계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2012 신춘문예-평론 가작(요약)] 신(新)키덜트, 운명에 순응하는 오이디푸스 전문 다운받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