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개봉일인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며 대뜸 ‘반공’을 강조했는데요. 오펜하이머도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로 내몰립니다. 1954년엔 비공개 졸속 청문회가 열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부 과학자까지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합니다. 진 태트록과 내연 관계가 까발려지는 등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심한 굴욕을 당합니다. 원자력위원회는 오펜하이머가 스파이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의 보안 인가는 박탈했습니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는 그야말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입니다. 그리스어로 ‘선지자’라는 뜻의 신화 속 인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몰래 전해줬다가 끔찍한 형벌을 받습니다. 오펜하이머도 2차 세계대전 종식과 전쟁 억제력을 갖춘 원자폭탄을 인류에 안겨주고 명성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죄책감과 스파이 혐의 등에 시달리며 삶이 망가졌습니다.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2017) 핵심 메시지가 ‘조국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였다면, ‘오펜하이머’는 조국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과학자의 이야기입니다. 만일 ‘인터스텔라’처럼 눈을 황홀하게 하는 볼거리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오펜하이머’를 보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화려한 영상이나 컴퓨터 그래픽(CG)보다는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감정 표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내면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표정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킬리언 머피는 감정을 극적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다면적인 감정 연기를 보여줍니다. 놀란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은 감정 연기를 극대화시킵니다. “미국을 위해 희생했는데 이런 취급을 받다니”라든지, “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니”와 같은 촌스러운 대사는 당연히 없습니다. 오펜하이머가 고뇌하는 모습과 핵이 분열하는 듯한 장면이 교차되고,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초점을 잃은 얼굴을 클로즈업해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특히 사운드를 활용한 연출이 두드러집니다. 트리니티 테스트 성공 후 오펜하이머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청중이 발을 구르는 소리와 정적의 대비를 통해 ‘죽음의 신’이 된 오펜하이머의 심리를 표현하는 장면에선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CG 없이 재현해냈다는 트리니티 테스트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이 고글을 쓴 뒤 사막 한 가운데서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새하얘질 정도로 엄청난 광량이 뿜어져 나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이내 충격파가 도달해 일대가 소란해집니다. 핵실험이 성공하자 오펜하이머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구절을 나지막이 내뱉습니다. 기자는 아이맥스(IMAX) 포맷으로 관람했는데, 확실히 몰입감이 대단했습니다. IMAX가 아니라면 사운드 특화관에서라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놀란 감독과 제작진은 이번 작품을 위해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65mm ‘흑백 IMAX 필름’을 직접 제작해 촬영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화려한 배우진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확실합니다. 미 육군 장교이자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 오펜하이머의 부인 키티 역의 에밀리 블런트,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웬만한 영화 주연급 배우들의 명연기가 펼쳐집니다. 여러모로 ‘오펜하이머’는 N차 관람하기 좋은 영화입니다. 배경지식이 늘어날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장면이 많을 겁니다. 옥에 티가 있다면, 자막의 맞춤법 오류입니다. ‘간(間)’은 ‘동안’의 뜻을 나타낼 때는 ‘이틀간’처럼 접미사로 붙여 써야 하는데, 영화에는 ‘이틀 간’처럼 띄어 쓴 자막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관객의 평가가 갈릴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상업영화의 간결한 기승전결 구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심리 묘사와 고증을 중심으로 한 서사와 연출이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일부 관객은 기대와 달리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선정성은 확실히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합니다. 여성의 상체 등이 그대로 노출된 정사 장면이 그동안 적용했던 ‘15세 관람가’ 기준에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영화 초반 오펜하이머와 진 태트록의 정사 장면에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이 낭독된 것을 두고 인도 현지에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다만, 노골적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 흐름상 필요했던 장면들로 보인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삶과 그의 이야기를 보면 그의 성적인 면모, 여성과의 관계는 그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했고, 킬리언 머피 역시 “의도적이며 불필요하지 않은 장면”이라고 밝혔습니다. 기자는 ‘오펜하이머’의 플롯 자체가 핵폭탄 같다는 일부 관객의 평가에 공감이 갑니다. 영화 초반부는 핵분열을 하는 듯 불안하고 긴장되며, 맨해튼 프로젝트 끝에 트리니티 테스트를 성공했을 때는 핵이 폭발하는 듯 감정이 분출되지만, 핵폭발 이후 닥치는 후폭풍처럼 오펜하이머는 뼈아픈 괴로움을 겪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