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혀둡니다. 기자는 가이 리치 감독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리치 감독 영화는 속칭 ‘때깔’이 좋습니다. 대중적으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인 ‘알라딘’(2019)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셜록홈즈’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기자는 액션이나 판타지 장르에서 리치 감독만의 매력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킹 아서: 제왕의 검’(2017)에서 보여준 화려한 시각효과와 촬영기법이 대표적입니다. 2021년 개봉한 제이슨 스태덤 주연의 ‘캐시트럭’에서도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함께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 능력을 뽐냈습니다. 묵직한 저음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내뿜는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역시 두 영화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자에게는 ‘믿고 보는’ 가이 리치 감독이기에 지난달 30일 개봉한 신작 ‘스파이 코드명 포춘’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특히 리치 감독과 여러 번 호흡을 맞춘 ‘페르소나’(영화감독의 분신 역할을 하는 배우)이자 할리우드 대표 스타인 제이슨 스태덤이 주연이라 재미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화 스토리와 설정은 익숙합니다. 무장한 괴한들이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보안시설을 공격,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장비를 강탈합니다. 영국 정보당국은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이 장비를 ‘핸들’이라 명명하고, 복잡한 정부 승인 없이 즉각 움직일 수 있는 비공식 팀을 꾸립니다. 도입부 설정만 놓고 보면, 정체 모를 위험물질인 ‘토끼발’을 찾는 ‘미션 임파서블 3’와 비슷합니다. 영화 제목인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주인공인 올슨 포춘(제이슨 스태덤)을 가리킵니다. 포춘과 함께 사라 피델(오브리 플라자), J.J. 데이비스(벅지 말론)가 팀으로 움직입니다. 최정예 인력으로 구성된 포춘 팀은 핸들의 운반책을 공항에서 포착하고 그를 추적하려 하지만, 정보당국이 애용하던 또 다른 비공식 팀이 개입하면서 사건이 복잡해집니다. 영화는 포춘과 그의 라이벌인 ‘마이크’ 팀이 핸들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로 진행됩니다. 영국 정보당국은 암거래 시장의 ‘큰 손’ 그렉 시먼즈(휴 그랜트)가 핸들 거래를 중개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올슨 팀은 그렉이 개최한 자선 행사가 열리는 초호화 유람선에 오릅니다. 그렉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 배우 대니 프란체스코(조시 하트넷)를 포섭했지만, 마이크의 팀원도 유람선에 잠복해있습니다. 영화 팬들이 ‘스파이 코드명 포춘’에 기대하는 건 제이슨 스태덤의 액션일 겁니다. 스태덤의 필모그래피는 액션 장르로 가득하니 당연합니다. 가이 리치와 호흡을 맞춘 ‘캐시트럭’에서도 휘몰아치는 액션이 감상 포인트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작품에선 스태덤의 액션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맨몸 격투와 총격신이 있기는 하지만, ‘메카닉’ 시리즈 등 호평을 받았던 스태덤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액션 비중이 아주 낮은 편입니다. 선발 출전이 기대되던 액션이 ‘노쇼’한 자리는 스태덤 특유의 유머가 차지했습니다. 포춘은 비싼 술과 휴가를 좋아하는 불만투성이 캐릭터인데, 연기자가 스태덤인 덕인지 밉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리치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코믹한 장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태덤이 가벼워진 만큼 장르가 애매해졌습니다. ‘메카닉’ 같은 하드코어 액션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드 로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액션 코미디물 ‘스파이’(2015)처럼 대놓고 웃기는 것도 아닙니다. 포춘과 그의 팀원들은 핸들을 찾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리치 감독도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런데 이렇다 할 긴장감이나 몰입감을 주는 상황 설정 없이 일이 술술 풀립니다.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사가 많고, 지루합니다. 올해 63세인 휴 그랜트의 캐릭터 변신은 성공적입니다. 주로 로맨스 영화에서 로맨틱한 신사 역할을 맡았던 휴 그랜트는 이번 작품에선 암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은 빌런 ‘그렉’을 연기했습니다. 너그러운 인상으로 흑심을 숨기는 속물 연기에서 관록이 드러납니다. 다만 그렉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마냥 잔악무도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은 탓에 빌런으로서 존재감은 약해 보입니다. 포춘의 팀원 두 명은 각자 개성을 보여줬습니다. 전략가이자 해킹전문가인 ‘사라’를 연기한 오브리 플라자는 그렉을 속여 핸들을 찾는 작전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로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행동대장 격인 ‘데이비스’를 맡은 벅지 말론은 분량은 작았지만 우직한 매력이 있고, 극중 유머 포인트에서도 활약합니다. 하지만 관객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1일 현재 CGV 실관람객 만족도를 나타내는 ‘골든에그’ 지수는 71%에 머물러 있습니다. “매력포인트가 하나도 없는데 왜 매력포인트를 선택해야만 관람평을 남길 수 있느냐”는 하소연에 공감을 표합니다. |